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iddhi kim May 06. 2024

인도에 대해 함부로? 단정 짓지 말자

-마치 코끼리 다리만 만져보고 온통 다 들여다본 것처럼-

-'허허(虛虛) 로움'때문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


인도는 황량 허허 로운 느낌 때문에  몹시 외롭다.

당시에 유학 온 학생들은 음식과 더위도 적응하기 어렵지만 무엇보다 심한 외로움에 지쳐 돌아가 버리게 되는 후배도 종종 있었다. 공부나 명상에 드는 일 이외에 학생이 할 수 있는 오락거리도 없다. 술도 없고 담배도 없다. 다만 나뭇잎에 담배와 마살라 등 향신료를 잔뜩 넣고 쌈 싸듯이 말아 씹어먹는 빤(paan)이라는 담배는 있다. 


인도인들은 주로 이 빵을 씹고 벽이나 땅에 뱉어 버리는데, 그 색깔이 마치 시뻘건 선짓국을 쏟은 거 같이  보기에 흉하다. 나중에 이 담배가 발암물질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지만, 사람들은 각성효과 때문에 가성비 좋은 이 씹는담배를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학과에 강사로 있던 어떤 교수는 유난히 이 담배를 즐겨 씹었는데, 그 담배를 씹으면 이빨까지 시뻘게진다. 늘 입술과 이빨이 빵으로 인해 시뻘겋게 물들어 있던 골초 애연가였던 그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술도 담배도 없는 데다 젊은 청춘인 유학생들은 인도 여성과는 교제도 절대 못한다. 만일 인도 여성 만나는 것을 그녀의 부모가 알게 되면 바로 결혼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중동에서 온 어떤 유학생은 인도 여성과 사귀다가 부모에게 들키게 되자, 결혼할 처지는 못되므로 몰래 밀항선으로 나가려다가 그 부모가 항구에서 기다렸다가 붙잡혀 왔다는 이야기가 우리 유학생들 사이에서 퍼지며 모두들 몸을 사려야겠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니 유학생들은 공부에 미쳐 책을 파고들거나 아니면 명상에 잠겨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준희에게 인도 유학을 권하셨던 교수님이 빛바랜 낡은 수첩을 펼쳐 보여주신 것이 생각났다. 그 수첩에는 수도 없이 동그라미와 엑스 표가 쳐져 있었다. 교수님께서 그러신다.


"너 인도 가면 참 외롭다. 그걸 견디어 내야 해. 이 수첩에 쳐놓은 동그라미와 엑스 표가 내가 인도에 있을 때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성욕을 얼마나 참아 냈어야 했는가를 표시해 둔 거란다."


이 말씀이 생각나면서, 준희는 어쩌면 표현은 안 하셨지만 교수님도 이 허허로움의 에너지를 느끼 셨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분이 일상에서 보여주셨던 멋진 여유로움도 아마 인도에서 체득하고 단련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인도에 와서야 알 수 있었다.



-카마 수트라(Kama Sutra)-

인도에는 고대부터 있던 카마 수트라가  있다. 이 경전은 4~5세기에 지어졌다고 알려졌는데 성애론서(性愛論書)라고 번역된다. 흔히 성에 관한 탁월한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저자의 의도는 정욕에 관한 비법을 알려주려는 의도가 아니라 금욕과 정신통일 방법을 통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려는 의도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성행위 자세가 묘사되며 그 방법까지 상세하게 나온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 고대 힌두전통 가르침의 일 편이라는 것이다.

힌두교가 강조하는 인생 3대 목적이 있다.

다르마(Dharma, 법) 아르타(Artha, 실리) 카마(Kama, 성애)다.


다르마는 인간의 도덕, 윤리와 더불어 우주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규범이다. 여기에는 카스트제도의 당위성도 포함된다. 아르타는 실질적인 재물, 부를 의미한다. 카마는 성에 관한 여러 가지 기교에 대한 설명이지만 작가 밧샤야나의 의도는 세상사람들의 삶을 위해 산문형식으로 구성해 작성한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성 자체도 금욕과 절제로 조절될 수 있음을, 그래서 성의 쾌락도 우주와의 하모니로 탄생한 것이므로 종교문화적인 목적성이 부여되고 있는 것이다.      


준희가 보기에, 인도 힌두교는 어느 종교나 문화 보다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긍정적이고도 적극적인 방향을 제시하고 있지 않나 하는 점이다. 사람들은 흔히 불교나 힌두교를 말할 때 금욕이란 단어 때문에 염세적인, 세상을 등지는 듯한 의미로 받아들이기 쉽지만 그건 결코 아니다. 


물론 깨달음이라거나 혹은 우주와의 절대 합일을 이룬 요기(Yogi)로 탄생하기 위한 큰 결실을 위해서는 엄격한 금욕이 필수적 임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는 상당한 위안을 주는 종교이자 문화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카마 수트라에 나오는 100가지가 넘는 성애의 기괴한 자세들은 인도 남부에 있는 힌두 사원에 그대로 조각이 되어 전체가 탑 형태로 조성되어 있으며 힌두교도들은 원숭이에게 숭배의 자세를 하듯이 거기에도 경의를 표한다.


준희는 그 조각들로 탑 둘레를 장식한 힌두사원에 갔다가 눈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 모를 정도로 민망해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또렷하다. 언제 적 조각인지 오랜 세월에 돌로 만들어진 조각이 여기저기 닳아 있는 것이 여러 군데 있는 걸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러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의 핵심은 이러한 성애도 모두 강렬한 허허로움에서 나올 수 있는 경지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작가가 금욕과 정신통일을 위해 세상사람들이 올바로 살아가는 방식을 전하려 했다는 것은, 이 허허로움을 올바르게 절제하고 조절하는 방법을 성으로도 풀어낸 것이 아닌가 한다.       


            


    

-인도 여행기에 대한 제의-

준희가 1988년도에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떤 유명 인사가 만나자고 했다.

그녀는 저서를 여러 권 쓴 사람인데 인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만나보니, 그녀의 요지는 본인이 인도에 여러 번 다녀왔고 인도에서 자선 사업도 하고 있으니 인도 여행기를 쓰고 싶단다. 그러니 도와달라고 했다.


준희는 단칼? 에 거절했다.

그녀의 제안을 들으며 모욕감? 마저 느꼈다.


'아, 이 미친..... 인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가볍게 남의 도움을 받아 자기 것인 양 여행기를 쓸 정도의 나라가 아니야. 그 심오한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 아니, 해보려는 시도도 아니하고 인도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 이건 적어도 인도에 대한 모욕이고 준희에 대한 모욕처럼 들렸다.


사람들은 인도에 대해 쉽게 아는 척하려 든다. 한 면만 보고는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이 내뱉는 걸 보면 준희는 아주 못 견디었다. 지금은 안 그러겠지만, 인도를 여행하고 온 사람들 혹은 여행 가려는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강 이렇다.


 "손으로 밥을 먹는다며...? " "너무 가난해서 끔찍하더라...." "과학이 발달되고 세계최초로 "0"이라는 숫자를 발명해 낸 나라.... " "원자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아직도 카스트가 존재하는 불가사의한 나라.." "수많은 신의 나라..." "현대 성자가 여전히 그 맥을 도도하게 잇고 있는 나라.... "   "지하자원이 아주 풍부하고 인구 13억의 미래 투자가치가 높은 나라..."


이런 내용 모두가 맞는 말이다. 어느 것 하나 틀린 것은 없다. 그러나 그런 대화에서 준희가 느끼는 감상은 그들의 그런 단편적인 지식을 인도 전부라고 매도해 버릴 때 오는 분노? 다. 손으로 먹고, 가난하고, 과학이 발달되고, 카스트 제도가 지금까지 존재하고, 성자들이 여전히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 등등은 모두 그럴만한 이유와 배경이 있으며 그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절대로 한 가지로 단정 짓지 말라는 것이다.  




-인도를 바라보는 시선-

준희는 인도땅에서 오는 허허(虛虛) 로운 에너지를 느낀 다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인도의 모든 것들이 용납되고 포용되고 심지어 애정까지 솟아났다.

그들의 가난도 잔인함도 더러움과 게으름도 모두 다 납득이 되고 밉거나 싫지가 않았다.

인도에서 행정절차가 얼마나 느려터진지는 그 당시 인도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러나, 준희는 그것마저도 그저 이쁨?으로 다가왔다.

왜냐하면, 이 허허로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 삶을 지탱해 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아는데, 이 땅에서 살아가느라고 무던히도 애쓴다는 동정심이 들기 때문이다.  


허허롭다는 의미를 달리 해석하자면, 텅 비어 있는 황량함 때문에 각자 몸속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빼앗기며 살아가게 된다는 뜻도 된다. 거기다 날씨까지 더우니 그저 늘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카페인이 든 우유로 만든 짜이를 하루에 두 잔은 반듯이 섭취하도록 공공기관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도 찻집에도 짜이 시간인 오전 10시와 오후 3시경이 되면 누구나 마셔대야 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텅 빈 황량함의 에너지는 원천적으로 뭔가 성취해야 한다는 악착같은 집착이 일어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생겨도 상호 비방하며 싸움을 벌이고 물어뜯기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전생과 내 생의 존재를 확실하게 제시하는 인도 힌두전통의 신화는 자신들의 삶의 비애가 모두 전생에서 비롯되었으니 참고 살며, 신에게 열심히 기도하면 내생에는 잘 될 거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니 가난에 대한 불만도 그리 크지 않다. 그래서 신이 태어난 날이나 혹은 신이 악을 물리치고 선을 쟁취했다는 축제일이 되면 열일 제쳐놓고 축제에 참여하는 높은 열망의 생생한 축제가 지금도 거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허허로움이 인간의 숨겨진 욕망이 최고조로 달아오르면 살아있는 며느리도 죽일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의 목을 칠 수 있는 잔인함의 극치로 발전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 빈자리를 욕망을 휘둘러 메꾸려는 의지의 반동으로 강하게 전환되기 때문이다. 그때 그 인간들의 의지는 누구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내면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 신문에서 하루는 한 컷의 사진이 실렸다.

한 남자가 가부좌 자세로 앉아 손을 무릎에 벌리고 모아 앉았는데 그 벌린 손안에 어린아이의 머리가 들어 있었다. 뉴스에 따르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신에게 바쳐야 한다는, 힌두교리에 따라 행했다는 것이다. 그가 경찰에 구속되었음은 물론이다. 신이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바치라는 의미는 살아가는데 일어나는 속물적인 욕심, 재물이 되었건 사람이 되었건 그런 대상에 집착하지 말고 신에 대한 올곧은 신성한 믿음을 바치라는 말인데 그 남자는 가장으로서 가장 아끼는 아들을 진짜 신에게 바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한 것도 모두 그 땅의 에너지!?  '<허허(虛虛)로움>'  때문이 아닐까~~~                                   


   

     

이전 11화 드디어, 의문의 실체? 와 마주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