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의 배신

논리적인 아무 말 대잔치

by 로미코샤Romicosha

최근에 저는 우산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확히는, 날씨가 흐릴 것 같아서 우산을 가방에 넣으려 했는데
정작 우산이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관계적 배신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우산의 행동 패턴을 잘 보면 묘하다.
비가 오면 사라지고,
비가 안 오면 지척에 있다.
이 현상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어떤 의도적 회피처럼 보인다.
우산은 자신의 본업이 수행되어야 할 순간에만
정확하게 자리를 비운다.
그런 의미에서 우산은
우리 주변 사물 중 가장 의지가 강한 존재라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우산을 다루며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왜 이 아이는 필요할 때만 없어지는 걸까?”


심리학에서 ‘선택적 접근’이라는 개념이 있다.
어떤 대상이 특정 조건에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현상을 말한다.
물론 그 개념은 살아 있는 존재에게나 쓰는 말이지만
우산에게도 묘하게 적용해 보고 싶다.
우산은 특정 조건 즉, -비가 오지 않을 때- 에서만
나에게 충실하다.
정말로 필요한 순간일수록
우산은 나와의 관계에서 거리를 둔다.
마치 “너의 실패는 나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더 깊게 들어가면
이건 하나의 기호학적 문제다.
우산은 비가 올 것을 예고하는 ‘징후’처럼 행동한다.
집에 우산을 두고 온 날 비가 쏟아지고,
우산을 들고나간 날은 햇볕이 쨍하다.
그렇다면 우산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라
일종의 역(逆) 기호적 시스템이다.
우산의 존재는 비를 부르지 않지만
항상 비와 반대되는 타이밍을 만들어낸다.
이건 거의 초자연적인 조율이다.
(물론 내가 기호학 전문가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느껴진다.)

나는 또 한 번 우산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우산은 인간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는 걸까?
예컨대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해도
필요한 것은 결국 운이다”
라는 메시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잉 해석은
어느 순간 허무하게 무너진다.
우산이 비 오는 날 사라지는 이유는
그저 내가 어디에 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호학도, 심리학도, 관계적 배신도 없다.
그저 산만한 인간의 문제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다.


우산은 그냥 비만 막아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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