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대 지름의 관점학

논리적인 아무 말 대잔치

by 로미코샤Romicosha

최근에 저는 빨대의 지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정확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려다

‘이 통로의 넓이는 누가 결정한 걸까?’

하는 궁금증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빨대의 지름은 단순한 물리적 크기가 아니라

선택의 역사처럼 보였다.

버블티의 과감한 넓이, 아메리카노의 얌전한 가늘기,

시대마다 등장한 용도별 규격들은

'얼마나 많은 것을 한 번에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인류의 조용한 논쟁의 흔적 같다.

마치 문명의 축적된 주사위 굴림이

최종적으로 남긴 평균값 같은 느낌.


빨대는 의외로 윤리에 가까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너무 넓으면 액체가 폭주하고,

너무 좁으면 숨이 답답해진다.


적절한 지름이란 결국

‘한 번에 넘치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주는

소형 도덕 교과서 같다.

욕망을 지나치게 당기면 고통이 생기고,

너무 억누르면 허기만 남는다는

아주 소박한 진실을 빨대가 대신 말해주는 셈이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


그러다 문득,

빨대는 단순히 빨아들이는 도구가 아니라

관점의 도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름이 조금만 넓어져도 음료의 세계에 한 번에 깊게 개입하게 되고,

가늘어지면 관여의 강도가 낮아지며 섬세한 교류만 허용된다.


지름이라는 물리적 한계가

내가 세계와 맺는 관계의 양식을 은근히 조절한다는 사실은

어딘가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다.


빨대는 사실 작은 망원경 같은 존재다.

세계의 흐름을 어떻게 들여다볼지

조용히 초점을 맞춰주는 관측창.


저는 그렇게 느꼈다.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빨대는 나의 호흡 대리인 아닐까?

빨아들이는 그 미세한 리듬은

호흡의 변주 같고,

지름은 흡입의 속도와 깊이를 대신 정해준다.


내 호흡은 늘 같아 보이지만

지름이 바뀌면 경험은 전혀 달라진다.

이 작은 관은 마치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세계의 압력을

몰래 조절해 주는 인공기관처럼 느껴졌다.


아무튼 결론은 하나다.


빨대 지름이 어떻든, 음료가 잘 마셔지면 된다.

keyword
이전 03화카페 테이블의 흠집에서 본 누군가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