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자치 대학교 박사 과정 연간 보고회
연간 발표회
나는 발표에 약하다. 전하고 싶은 의견은 있지만 말로 옮기다 보면 전달하고픈 메시지는 간데없이 사라지고 횡설수설하고야 만다. 학부 시절에도 조별 과제만 하면 나는 피피티를 만들거나 자료 조사 담당을 자원했다. 발표란 발표는 피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피하는 인간, 나는야 안티-발표형 인간이다.
하지만 이곳 바르셀로나 자치 대학교 박사 과정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모두 이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 연간 보고회, Annual Report. 연간 찾아오는 이 발표 행사는 오로지 대면으로만, 그리고 필수로 참석해야 하는 연례행사다. (직장과 병행하는 경우) 비대면이나 파트타임으로 박사 과정에 참여하더라도 6월 보고회 행사는 반드시 대면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물론 나도 6월 2주가 발표 주간임을 감안해서 5월 초에 입국을 한 거였고, 그 뒤로는 논문 작업과 동시에 5월 말부터는 발표 준비를 시작했다.
5월 마지막 주에는 10쪽짜리 보고서를 미리 작성해 제출해야 했는데 인적 사항과 현재까지 진행된 연구 전반에 관해 설명하는 보고서 형식이었다. 이미 전반적인 진행 상황을 보고서로 제출했으니 발표는 보고서에 실리지 않은 내용을 보충 설명하고, 중요한 내용을 시각적 자료와 함께 검토하는 형식으로 진행하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올해 연간 보고회(Annual Panel)는 6월 10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진행되었다. 원래는 금요일까지 이어졌어야 했으나 일부 학생들은 유예를 신청해 올 10월 중에 발표할 예정이라는 일정표가 떴다. 일정표에는 발표 모둠 명단, 모둠에 따른 시간과 순서, 평가 교수단, 전반적인 진행 정보 등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총 6개의 모둠 중에 그룹 1은 카탈란, 그룹 2와 3은 스페인어, 그룸 4와 5는 영어, 그룹 6은 스페인어로 진행된다.
나는 그룹 5의 세 번째 발표자였고, 6월 11일 수요일 2시 30분부터 4시 30분으로 일정이 잡혀있었다. 공문 내용으로 대략적인 개요를 확인했음에도 1년 차로써 처음 이 행사에 참여하는지라 스페인어로 진행되어서 많이 이해하지는 못할지라도 미리 한 번 지켜보는 게 좋겠다 싶어 첫째 날 그룹 1의 발표를 참석해야겠다 마음먹었다.
6월 10일 화요일
그룹 1의 발표 일정은 오전 9시부터 11시 30분까지다. 내가 발표하는 것도 아닌데도 보고회 주간이 시작하니까 괜히 긴장되는 마음에 아침 일찍부터 일어났다. 차라리 일찍부터 가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 싶어서 아침 댓바람부터 교육학과 건물 벤치에 앉아 내 발표 자료를 달달 외웠다. 8시 50분쯤, 이제 슬슬 들어가도 되겠지 싶어서 건물에 들어가 세미나실을 찾았는데 저런, 문 앞에는 꼴랑 3명이 모여있었다. 게다가 문도 열려 있지 않았다. 오늘 같이 중요한 날에도 스페니시 타임이 적용되는 거였나요. 발표자와 교수님들은 태평하게 누가 문 열어 주겠지, 하시면서 문 앞에서 아침 인사를 하고 계셨다. 문은 9시 정각에 열렸다. 일정표에 9시라고 적혀 있던 걸 9시 시작이라고 해석한 건 나의 안일한 실수였으려나. 물론 시작은 9시가 아니었지만 학생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덕분에 장내는 금방 정리되었고, 평가하시는 교수님들도 자리를 잡아 이내 발표가 시작되었다.
기억 남는 순간은 발표 시간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는 거였다. 7분의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게 발표 가이드라인에 적혀 있긴 했었다. 그렇지만 첫 발표자부터 그 규정을 아주 시원하게 날려 먹었는데 심지어 이 학생은 제한 시간을 인지하고 있다는 신호로 파워포인트 상단에 빨간색 타이머를 올려 두었다. 정작 본인이 발표를 마친 시간은 14분을 넘긴 시간. 그렇게나 강렬하게 제한 시간을 어길 거면 대체 왜 슬라이드 상단에 타이머를 심어 두는 것인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이러한 순간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름대로 진지한 분위기에서 발표가 진행되는데 그 와중에 사람들이 한 두 명씩 헥헥대면서 (학교 내 언덕이 많다.) 입장하는 게 내 시각에서는 굉장히 웃겼는데 나빼고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긴 했다. 첫 발표자가 발표를 시작했을 때만 해도 참석자는 대여섯이었는데 중간에 들어서자 스무 명 가까이 되었다. 내가 발표자라면 한 명씩 냅다 들어와서 문 벌컥, 의자 끼익 거리면 신경 쓰일 것 같은데 다들 집중력이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긴장감과 태평함이 기묘하게 섞인 세미나실이었다.
희한스러운 발표회 분위기와는 반대로 발표 자료는 모두들 굉장히 전문적이고 상세했다. 어쩌면 1년 차인 나는 본격적인 연구나 수업 적용에 돌입한 것도 아니니 내보일 자료가 많이 없지만 이미 박사 과정 중간에 돌입한 학생들은 제시할 자료가 많아 발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일 수도 있겠다 여겨지기도 했다. 그래도 14분은 너무했지만 말이다. 그룹 1의 발표는 카탈란으로 진행되었으니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어도 제시되는 파워포인트 자료만 봐도 그 방대함과 규모에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발표가 다 끝나고 나서 커피 브레이크를 한 시간가량 갖고 그룹 2의 발표가 시작되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교수님에게 커피는 무슨,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고 줄행랑치려는 걸 교수님이 만류해 거의 인질 마냥 붙잡혀 있는 참이었다. 옆에 한 학생이 커피를 따르려고 하는 걸 보고 용기 내어 물었다.
"혹시 발표하시나요?"
돌아오는 대답은 힘없는 예예. 그 모습이 딱 내 마음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혹시 몇 연차신가요?"
역시나 지금 첫 학기를 마무리한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거다. 잔뜩 쫄아있는 게 딱 1년 차의 폼이었다. 이 분으로 말씀드리자면 이집트에서 온 사라, 본국에서 대학 강사를 하고 있는 연구생이었다. 그렇게 동지를 만나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니 또 다른 1년 차와 2년 차 연구생들 몇몇 씩 모여들어 둥그런 원이 만들어졌다.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곁에서 들으시던 내 지도 교수님이 그러신다, 왜들 걱정하시나요, 그룹 1은 졸업하는 연구생들이라서 그렇습니다. 마치 지나가던 도인이 깨달음의 말을 건네는 것처럼 가볍게 던진 말에 우리 저연차 연구생들 얼굴에는 환희의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래, 자라나는 연구 새싹인 우리에게도 희망은 있는 거였어!
교수님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깨는 여전히 무거웠다. 반면, 발표를 마친 학생들 얼굴은 그렇게나 온화할 수 없었다. 아무리 성적이나 평가 결과가 집계되지 않는 자리라 할지언정 교수진과 동료 연구생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1여 년 간 진척한 연구 자료를 공유하는 건 영 긴장 되는 일이다. 결국 저연차 연구생들은 커피 브레이크를 마치고 제각기 집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의 발표가 곧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