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거주증
하고 싶은 것이 있고,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하고 싶은 건 나가 노는 것이지만 해야 하는 건 논문 작업과 비자 신청이다. 하지만 후자 없이는 전자는 가당치도 않으므로 해야만 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씨따, 씨따, 말만 들었지 직접 해보는 건 처음이다. 지난번 석사 때 코르도바 갔을 때 학생 비자를 한국에서 만들어 갔지만 띠에 신청하는 건 하세월이 걸릴 듯하여 애초에 포기해 버렸다. 어차피 6개월도 채 안 채울 예정이어서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여기선 3년 이상의 장기 거주가 예상되어 비자 업무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씨따를 조우하게 되었다. cita, 말 그대로 예약이다. 내가 경찰서에 방문해 필요한 업무를 보겠다는 예약. 내가 처리할 업무는 현재 갖고 있는 학생 비자를 TIE(Tarjeta de Identidad de Extranjero), 즉 스페인 외국인 등록증으로 바꾸는 작업이다. 비자 업무를 보다 보면 니에, 띠에, 씨따라는 말을 듣게 된다. 니에와 띠에는 다른 개념이다. 학생 비자를 발급받으면 NIE(Número de Identidad de Extranjero), 외국인 등록 번호라는 것이 적혀 발급되는데 여권 번호와 같이 내 신분을 증명하는 번호가 된다. 그러니 외국인 등록 카드인 띠에 발급을 신청하면 니에 번호가 적혀 발급받게 되는 것이다.
씨따 잡는 것은 꽤 까다로운 일이다. 이선좌, 콘서트 좌석이나 야구장 예매로 인터파크 좀 들락날락해본 분들은 익숙할 문구다. 이미 선택된 좌석입니다. 씨따는 아이유 콘서트, 어린이날 야구 경기 응원석만큼이나 예약을 잡기 어렵다. 왠지는 모르겠다, 일단 스페인을 탓하자. 유럽 행정 처리가 느리고 어딘가 효율적이지 않은 것에 대해선 익히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비행기로 열두 시간 가야지 겨우 닿는 나라의 사람들에게까지 그런 소문이 퍼진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띠에 신청 작업에 돌입했다. 난 이미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3월에 학생 비자를 발급받아 놓고선 5월 초가 되어서야 출국했으니 말이다. 학생 비자의 만료 날짜는 6월 19일, 반드시 그 이전에 씨따를 잡아야만 했다 (띠에 신청을 해놓으면 임시 거주 기간을 연장시켜 주기 때문에 비자 만료 날짜는 자연스럽게 소멸된다). 이제 경찰서에 제출할 필수 문서를 드래곤 볼처럼 여기저기서 모아야 할 때다. 먼저, 교내 캠퍼스에 있는 국제 학생 지원 사무실을 방문했다. 비자 신청 작업을 대행하지는 않지만 국제 학생이 어려움 없이 이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여러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무실이다. 간단하게 어떤 서류를 어디에서 떼야하는지, 어디 링크를 참고해 서류 목록과 서류 작성법을 확인하는지에 대해 안내를 받았다. 띠에 신청을 마친 지금에서야 돌이켜보건대 국제 학생 지원 사무실을 방문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인터넷 어디든 정보를 쉽게 수집할 수 있다만 대면으로 교직원과 상담하는 건 여태 쌓아온 데이터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더없이 실용적이었다. 여태까지 국제 학생들이 어떤 단계를 까다로워하고, 어느 부분을 더 대비해 두어야 하는지 미리 알아두는 건 내 입장에선 굉장한 편의이자 시간 단축 요소로 작용했다.
첫 일주일을 보내며 바쁜 마음에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서류를 준비했다. 기숙사에서 제공한 서류로 시청 가서 Empadronamiento (거주증명서)를 떼고, 캠퍼스 내 은행에서 세금을 지불하고 영수증 서류를 받았다. 학기 중도 입국이 문제가 될까 우려되어 미리 학과 측으로부터 공문을 요청해 영문본, 스페인본을 받아 두었다. 스페인 행정의 악명에 대비하여 난 온몸을 서류로 칭칭 감고 무장했다. 굉장히 놀라웠던 건 스페인 행정이 여태 수없이 생산한 밈과 악명에도 불구하고 내가 밟은 행정 절차는 아무런 문제 없이 매끄럽게 흘러갔다는 것이다. 감동이었다. 역시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마음을 비워야 작은 일에도 큰 감사를 느끼게 된다. 스페인 행정 처리는 불교적 깨달음마저 시사한다.
그리하여 나는 5월 23일 금요일, 람블라 거리의 경찰서로 향하게 된다. 아무래도 뜬금없는 5월 중순이어서 그런지 씨따를 잡는 것도 수월했고, 경찰서 목록 중 대강 눈에 익은 람블라 거리를 골랐다. 오히려 잘됐다. 이왕 나간 김에 시내 구경이나 하게 말이다. 경찰서는 시내 중심가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꽤나 규모가 큼직했다. 가방 검사와 금속물 탐지기를 거쳐 해당 업무를 보는 사무실로 걸음 했다. 예약 시간은 11시 30분이었으나 바짝 긴장해 10시 조금 넘어 도착했다.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오밀조밀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창구에 보려는 업무를 이야기하고, 번호표를 주면 전광판에 내 번호가 뜰 때까지 대기하면 된다. 이제 여권을 꼭 부여잡고 얌전히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내 번호가 떴다. 난 전전번호가 불릴 때 이미 앞줄에 앉아 있었다. 엉덩이에 용수철이라도 붙은 듯 자리에서 튕겨져 나와 창구로 향했다. 12번 창구, 근엄한 여성 분이 키보드를 토독 토독 치고 계셨다. 올라, 하셔서 나도 올라, 했다. 아무렴 기가 죽은 올라를 듣자 하니 얜 아무래도 스페인어로는 안 되겠다 판단하신 모양, 직접 서류 폴더를 손으로 가리켜 챙겨 가신다. 몇 장은 스캔 뜨고, 사진은 직접 챙겨 가시더니 또 어떤 건 키보드로 입력하신다. 그리고 지문을 뜨자고 하셔서 손가락을 냅다 등록기에 댔다. Más fuerte, 있는 힘껏 누르는데도 뭐가 제대로 안 되는 건지 직원 분이 플라스틱 판 너머로 손을 뻗어 내 손가락을 꾹 꾹 눌러주셨다. 자문 채취에도 기술이 있나 보다.
모든 건 10분도 안 되어 끝난 듯하다. 그렇게 내 손에 쥐어진 합격 목걸이, 가 아니라 확인증. 이 종이에는 비자 만료일자가 지난 뒤에도 거주를 허용하는 임시로 연장된 거주 일자와 띠에 신청했음을 알리는 정보가 기입되어 있다. 이 확인증 원본을 들고 1달 뒤 다시 이곳으로 와서 띠에 실물 카드를 수령해 가면 된다고 한다. 서류를 뭉탱이로 준비해 온 거 치고는 굉장히 간략하게 신청이 끝나버렸다. 혹시 이 서류는 안 필요하신가요? 그럼 저 서류는 별로 안 궁금하신가요? 직접 갖다 바치고 싶은 서류가 다발로 있었단 말이다. 특히 입학 허가서에는 28년도까지 학업 기간이 명시되어 있는 만큼 띠에가 발급될 때 1년 단위가 아닌 총 학업 기간을 통틀어 거주 허가가 났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결과가 나올지 모르겠다. 길게, 최대한 길게, 쭈욱, 아주 냅다 눌러앉을까 싶을 정도로 낭낭하게 허가 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