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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현지 초등학교 견학

바르셀로나 초등학교 실습

by 이해린

밝고 환한 미소를 가진 교수님, 낯익은 에밀리 교수님이다. 그리고 엥, 누구세요. 교수님은 옆에 금발 머리에 보라색 안경을 쓴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 우리 딸이 눈 수술을 받았는데 집에 혼자 못 있어서 오늘 같이 다녀야 돼! 혜륀, 드디어 만나서 정말 반가워. 오는 길은 안 힘들었니?”

그리하여 교수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내가 서 있던 곳이 연구동이 아니라 강의동이어서 혼자 들어갔었다가는 미로에 갇혀 한참 헤맬 뻔했다. 교수님을 입구에서 만난 게 천만다행이었다.


교수님과 한 시간가량 회의를 했다. 회의라기보다는 근황 전달식에 가까웠다. 우린 작년 봄부터 교류를 했음에도 이제야 만나게 되었기에 못내 반가움을 내내 갖고 있었고, 그리하여 회의보다는 수다에 가까운 대화가 이루어졌다. 교수님은 건물 곳곳을 소개해 주셨다. 그러면서 자기는 가끔 없는 척할 때가 있다는데 그 이유는 스패니시들은 말이 너무 많은 나머지 본인들도 서로를 감당하기 힘들어 한다는 거다. 결국 그들은 고육지책으로 재실 중임에도 불을 꺼놓고 있는다거나 문 잠그고 있을 때가 있다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역시 스패니시 골 때리는 민족이다. 칭찬이다.


한 시간가량의 심도 깊은 수다에 이어 교수님과 딸 릴라와 함께 리써치 그룹 회의를 하러 갔다. 릴라가 눈이 잔뜩 충혈돼 집에 못 있는 바람에 엄마 직장까지 따라왔지만 툴툴대지 않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어서 옆에 가서 이런저런 말을 붙이니 나한테도 그림을 하나 선물해 줬다. (교수님이 반강제로 선물시킨 거에 가깝긴 했음) 내가 바닥에 엎드려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릴라랑 같이 노니까 교사들은 어쩔 수가 없는 거냐며 재밌어했다. 교수님, 제 직업병이 우스우신가요. 그 와중에도 릴라는 작품을 공장처럼 찍어냈다.


10시 반에는 리써치 그룹 모임이 있었다. 릴라, 교수님과 나는 복도 아래에 있는 회의실로 함께 향했다. 릴라는 이미 색칠 도구로 네 개의 작품을 완성한 뒤였다. 그녀는 이제 종이와 가위로 새로운 미술을 창작할 참이었다. 리써치 그룹에 대해 사설하자면 GRIEP이라는 약자를 가진 스페인 정부 지원을 받는 연구 모임이다. 이곳은 바르셀로나 자치 대학교(UAB)에서 연구 방향이 비슷한 교수님들이 공동체로 모여 운영하는 곳이다. 주로. 제2언어 교육, 외국어 교육, 바이링구얼 등 언어 교육을 확장시켜 나가는 교육적 방법을 모색하고, 프로젝트를 통해 사례 적용을 해나간다. 그 중 오늘 있을 회의는 리써치 그룹과 협업하는 한 2년 차 박사생이 마련한 자리였다.


제나는 영국 워릭 대학교에 적을 둔 교육학 박사다. 그녀는 이전에 마드리드에서 거주한 경험을 기반하여 프로젝트 현장 연구를 영국이 아닌 스페인에서 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내게 말하길 행정 처리가 훨씬 수월하고, 학교 측에서 더 협조적이라고. 제나가 연구하는 프로젝트는 Drama-based learning in English learning classes for adults라고, 드라마 기법을 활용해 성인 대상 영어 교육 수업을 설계하는 거였다. 회의가 시작되고 첫 삼십 분은 현재 GRIEP 리써치 그룹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 과정을 공유하고, 나머지 삼십 분은 제나가 현장 사례 적용 결과에 대해 발표했다. 제나는 설계한 수업을 마드리드 시내 외국인 성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영어 교육 기관과 난민 센터에 적용했다고 한다. 그녀의 연구가 어떤 이론을 기반으로 디자인 됐고, 적용하는 과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었으며 향후 어떤 발전을 꾀하는지 등에 대해 발표가 이루어졌다.


한 시간여 가량의 회의를 마치고 우린 가방을 챙겨 곧장 인근 초등학교로 향했다. 초등학교 교사 20명을 대상으로 제나의 수업 프로젝트에 대한 워크숍을 진행하기 위해서였다. 학교는 학교 캠퍼스에서 차로 20분여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다. 우린 교수님 네 분과 나와 다른 박사생 한 명, 제나, 물론 릴라까지 함께였고 학교 내 미팅 장소로 가니 이미 학교 선생님들깨서 삼삼오오 모여 계셨다. 마치 교직원 회의나 교직원 연수를 앞두고 잠깐 모여 떠드는 그 정다운 모습은 지독히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맨 처음, 우린 서클을 만들고 자기소개를 한다. 대 신 단순히 이름만 말하는 게 아니라 나를 표현하는 작은 몸동작을 곁들여야 한다. 제나는 번개 모양 손짓을 하고, 누구는 드럼롤을 하거나 다른 누구는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찌르는 시늉을 했다. 나는 혜-린이라고 하면서 삐걱삐걱 웨이브를 했다.


다음으로는 바르셀로나 지역에서 제나가 직접 찍은 사진을 6장을 보면서 의논을 한다. 발문은 다음과 같았다. 이 사진은 어떤 상황을 포착한 것 같은가요? 이 사진에서 들리는 소리, 맡아지는 냄새, 보이는 풍경은 어떤가요? 이 사진 속 상황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대화가 오고 갈 수 있나요? 이런 대화를 쌓아가며 우린 사진 속 상황에 점점 더 몰입해 나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상황 속 장면을 재연한다. 교사 시범 또는 예시로 해변 사진을 먼저 뽑았다. 제나가 물었다, 이 사진 속 인물이라면 어떤 장면을 만들 수 있을까요? 내가 작게 수영하는 시늉을 했더니 제나가 날 소환해 무대 중앙에 서게 했다. 그리고 정지 동작으로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했다. 내향인에게 무대 중앙에서 수영하는 시늉을 정지 동작으로 가만히 있으라니요,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대 속 등장인물은 점점 많아졌다. 수영하는 날 주변으로 몰려드는 상아 두 마리, 날 감싸는 튜브, 해변에 누워 태닝 하는 아이, 그 아이에게 선크림을 발라주는 엄마 등등. 10명이 한 장면을 만들어냈고, 모두 정지 동작으로 서있었기 때문에 마치 현대 예술을 하는 작가들 같았다. 그러다가 제나가 머리 위를 버튼처럼 누르면 그 인물은 살아 움직여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제나가 내 옆의 선생님 머리를 누르는 시늉을 했다. 그 선생님은 상어였다.

“널 잡아먹으러 갈 거야!”

제나가 이번에는 내 머리를 눌렀다. 난 빠르게 헤엄치는 시늉을 하며 외쳤다.

“아악! 상어다!”


시범 활동을 함께 하고선 모둠으로 나누어 각 모둠마다 사진을 받아 들어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우린 카페를 받았다. 나는 신문을 읽는 척하고, 내 앞에는 동료 역할을 맡은 선생님, 주변에는 종업원과 손님 역할을 맡은 선생님들이 서 있는다. 버튼을 누르면 우린 종알종알 말을 한다. 어떤 모둠은 콘서트 장면을 받아 신선한 재연을 해냈다. 버튼을 누르니 괴성을 지르는 락커, 콘서트를 보는 진득한 애정 행각을 하는 커플이 만들어졌다. 단순히 집 앞 거리 사진이었는데도 훌륭한 장면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버튼이 눌리자 이런 대사가 오고 간 것이다.

“후안, 빨리 저녁 먹으러 들어와! 밥 식는다!”

“엄마, 5분 만요!”

엄마에게 절대 줄지 않는 5분을 간곡히 요청하는 건 만국공통인 것일까.


수업 활동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는 것으로 워크숍을 마쳤다. 선생님들께선 각자 맡은 과목이라든지, 학년군에 따라 어떻게 이 수업을 변형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소감을 나누었다. 모두들 각자의 자리에서 고심해 의견을 내놓고, 수업을 어떻게 더 발전시킬 수 있을지 논의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당장 오자마자 일주일 만에 현지 학교에서 워크숍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얼떨떨했다. 뿐만 아니라 나도 앞으로 사례 연구를 위해 수업 안을 작성하고 적용시킬 수 있을까, 그건 어떻게 진행시켜 나갈 수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께선 네트워킹에 익숙지 않은 나를 위해서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소개해 주셨다. 그래서 이번 워크숍 담당자인 선생님께도 연락처를 받아 다음 수업 설계를 이곳에 적용해도 되려는지에 대해 더 이야기를 해보기도 했다. 내가 무언가를 이루어낸 것도 아닌데도 곧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과 기대감에 잔뜩 부풀었다.


세상마상에나, 고작 일주차인데 어쩜 이렇게 일이 술술 풀리는지, 아니면 혈혈단신의 타지 생활이 이제 시작한다는 거에 필요 이상으로 바짝 쫄아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작이 좋다, 매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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