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th & English Ministy 전도사가 본 이민교회 현실
나는 약 1년 반 정도 한인교회에서 전도사로 영어사역부(EM: English Ministry)를 담당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유스이엠Youth & EM 담당목회자였다. 공부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던 내가 한인교회 전도사가 된 것은, 그것이 영어사역부라서 가능했던 것이다. 당연히 영어사역부는 영어를 잘해야하기 때문에 유학생보다는 이민 1.5세들(초중고생때 부모따라 이민온 사람들)을 선호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영어만’ 잘하고 애들이랑 ‘너무 잘’ 어울리면 ‘안된다.’ 한국말도 잘해야 한다. 왜? 그들이 영어 잘한다고 2세도 써보고 했더니만 정체성이 그냥 ‘미국인’이라 한인회중이랑 의사소통도 잘 안되고, 한국문화도 이해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영어사역부 담당목회자는 ‘어른 회중이 이리저리 시키는대로 군소리없이 애들 통제할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의미를 더 좁혀보면, ‘어른들 예배할 때 애봐줄 사람’이었다. 그런데 공식적인 언명은 이랬다. ‘한인이민자로서 장차 교회의 미래를 지켜갈 인재양성을 도울 사람.’
어른들은 일년에 딱 한 번, 그 주제를 가지고 예배할 때만 영어사역부 애들을 불러다가 노래시키고 장차 우리 교회의 미래라고 박수치고 끝이었다. 나머지는 오로지 권위적인 한인회중의 변덕스런 계획에 따라 이래라 저래라 급히 떨어지는 일정변경, 마음대로 생겨나는 아이들 내세우는 역할의 연속이었다.
결국 1.5세 사역자들도 그 괴리와 부당함을 겪기 힘들어다하다가 일이년 하다 금방 그만 두고 하는 자리였다. 내게 이 자리를 소개했던 목사 말이 ‘애들이 너무 불쌍해요, 전도사님’이었다. 정말 그랬다. 이민 2세대는 안타까웠다. 1세대인 부모들이 한국에서 일제시대와 군사독재 시절에 쌓은 부를 들고 미국에 숨어사는 호사스러운 경우가 아닌 한은, 다 한국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전세계로 먹고 살러 나온, ‘한인 디아스포라diaspora’(흩어진 민족)였다. 세계에 이런 민족에 중국인, 유대인, 월남인들이 있다. 일본인처럼 잘 살면 굳이 나와살 이유가 없다.
이런 말이 있다. ‘공항에 데리러 나온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이민온 사람 하는 일이 달라진다.’ 부모세대는 말 그대로 무작정 나온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서류미비자’(undocumented: 불법체류자를 완화해서 부르는 말)도 적지 않았다. 영화 ‘미나리,’ 드라마 ‘김씨네 편의점’ 등이 그런 분위기를 아주 잘 묘사했다. 자신들이 영어를 잘 못하니깐 그간 학교 좀 다니며 영어를 빨리 배워간 애를 앞세워 다니며 일을 본 사람들도 많았던 모양이다. 상점계약 같은 데에 아이를 데리고 나가, ‘니가 좀 얼른 읽어봐,’하며 등 떠밀었던 것이다. 그때 그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이민 십년, 이십년이 지나도 영어를 잘 못하는 부모를 보며 무슨 생각이 들까.
부모는 쪽잠 자가며 휴일도 없이 수십년 일해서, 아이를 어찌어찌 명문대학에 보내고, 심지어 의사까지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가 그러는 동안, 아이들은 학교 다녀와서 밤까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물어볼 데도 없는 숙제를 혼자 알아서 해야하고, 챙겨야할 준비물도 알아서 준비해야한다.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를 보며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외로움, 서러움과 슬픔, 미안한 마음이 깊어져만 간다. 아니면 그저 부끄러운 마음만 깊어져 간다.
부모는 처음에는 아이가 학교가서 영어도 금세 금세 늘고, 수학도 만점 받아 오고 하니, 그저 잘한다 잘한다 할 수 밖엔 없다. 그러나 그렇게 부모없이 사춘기를 지나 훌쩍 혼자 커버린 아이는 이미 말 안 통하는 남의 나라 사람, 미국인이 되어버려 나중에는 거의 의절하다시피 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보통은, 미국사람들처럼 맺힌 데 없이 선량하게 자라난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 알기를 끔찍이 소중하게 아는 경우가 많다.
중고생부터 직장인까지 다 모여봐야 열 댓 명. 사역을 하다보면, 유스이엠 학생들 혹은 직장인들은 자기들끼리 신나게 놀고 있다가도 갑자기 부모가 뭘 시키면 할 수 없어하면서도 짜증 한 번 안 내고 자리를 떠나 부모가 시킨 일을 하러 가곤 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이런 일 시키는 부모를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으니(부모의 희생 때문에) 가서 도와드린다,’인 경우가 많다. 부모는 자신들이 이민 나온 그 해를 죽을 때까지 살다 간다. 1970년, 80년의 못사는 한국에 멈춰 버린 것이다. 새로운 생각과 배움의 업데이트는 미국 사회를 통해 해야하는데 그게 안 된다. 그러니 부모 자식 간에 정서적 차이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심지어 애들도 그게 그냥 고유한 ‘코리안 컬쳐’인 줄 알고 그거 존중한다고 생각이 21세기 한국 동년배보다 저 오랜 어디에 멈춰버린 경우도 적지 않다.
나는 내 역할을 그렇게 여겼다. 너희 부모님이 왜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를 이해시켜주고, 한국에 대한 상처와 부끄러움을 치유하고, 자랑스러운 한인으로 미국 사회에도 잘 적응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설교할 때, ‘너희 부모님이 일본을 무조건 미워한다고 해서 수퍼레이시스트(super raicist: 엄청난 인종차별주의자)랄게 아니다. 그럴만한 곡절이 한국근현대사에 있었다,’ ‘오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부모님을 부끄러워할 게 아니다. 한국은 민주화와 경제화를 동시에 이뤄낸 세계사상 거의 유래없는 나라다,’라고 하면, 부모 손에 이끌려와 반쯤 졸며 듣던 아이도 눈에서 빤짝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똑똑한 아이들이라 잘 알아 들었다.
그런데 박사학생 티를 내느라 그랬는지, 그런 말만 잘 하고 정작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 주는 것은 잘 못했다. 일단 내가 ‘공놀이’를 끔찍하게도 못 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농구나 볼링을 먼저 하자고 잘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애들이 농구하면 지켜보다 나가서 음료수를 사오거나 성경공부가 있는 금요일 밤에는 아이들과 직장인들이 좋아하는 한국 빙수집에 가서 먹고 놀다 오거나 했다. 그것도 헤어지는 길에는 각자 차에 가는 방향 아이들을 태워서 집까지 ‘라이드(ride: 차 태워주기)’를 해줘야 했다. 사춘기 중학생 학생을 데리고 교회를 오가야 했는데, 그 길이 얼마나 어색하고 부담이 되던지.
그렇게 빙수집을 오가던 때였는데, 한 주는 아이스크림을 두 통들이를 세일하길래 사서 가져갔다. 그리고 주방에서 수저를 가져다가 드르륵 던져놨더니 아이들이 동그래진 눈으로 날 보는 게 아닌가. '응? 왜? 뭐?' 알고보니 한 통 아이스크림을 여럿이 돌려 퍼먹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주방에서 스텐레스 컵을 가져다가 하나씩 줬다. 그러다 담임목사 아들이 한국에서 온지 얼마 안 되어 잘 몰랐는지 자기가 먹던 수저로 아이스크림을 더 푸려 하자, 아이들은 바로, '그건 더블 디핑(침 묻은 식기로 공용음식을 먹는 것)이야. 안돼.That's double dipping. Nope.'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게 아닌가. 아차차, 공용수저를 또 갔다줬다.
그 다음 주에는 빙수집을 갔다. 그런데 애들이 빙수가 두 개 나오자마자 그걸 마구 섞더니 다같이 퍼먹는 게 아닌가?! '응? 이게 뭐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마도 아이들 머릿속엔 아이스크림=미국음식이니 미국식으로, 빙수=한국음식이니 나눠먹는게 당연(?) 이런식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라 웃음이 났다.
한 번은 아이들을 우리집에 초대해서 같이 밥 먹고 논 적이 있다. 아이들은 이미 많은 사역자들 집에 가봤을 것이었다. 메뉴도 고민해서 짜야했다. 일단 애들이 알러지가 있는지도 알아봐야 했고, 매운 걸 잘 못 먹는다니 정통 한식으로는 뭐 해줄 게 별로 없었다. 그래도 고민고민해서 콜라찜닭과 궁중떡볶이를 메뉴로 올렸다. 다행히 히트를 쳤다. 아이들은 처음 먹어본다며 맛있게 잘 먹었다. 끝나고 아이들은 너무나 한국아이들처럼 각자 먹은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몰려들었다. 여기 식기세척기에 넣으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깜짝 놀라며 까르르 웃는게 아닌가. 왜 그러냐 그랬더니, 자기들은 한국 사람이 식기세척기 쓰는 거 처음 본단다. 자기 부모들은 식기세척기 못 믿겠다며 그걸 그냥 식기건조대로 쓴다는 것이었다. 우린 서로가 신기했다.
금요일 저녁 성경공부 시간에, 아이들에게 라면을 끓여주었다. 유학시절 징하게 먹는 게 라면인데, 라면이라면 쫄깃하게 잘 끓이는 나로서는 최선의 결과를 내야했다. 게다가 물양 맞추기 어려운 짜장라면이었다. 그것도 한인마트에서 늘 세일하는 1등 브랜드는 맛이 없어서, 우리가 따로 찾아먹던 브랜드거를 사다가, 계량컵까지 써가며 물 양을 맞췄더니, 아이들이 뭐하는 거냐며, 뭔 라면을 이렇게 끓이냐고 웃었다. 하지만 다행히 물 양이 귀신같이(교회서 귀신..) 맞아서, 적당히 꾸덕하면서 간간하게 간이 잘 맞았다. 비웃던 애들은 라면을 먹어보고는 정색을 하며 ‘우리 엄마가 해주는 거보다 훨씬 맛있다’고 칭찬을 하면서 그릇을 싹싹 비웠다. 보는 내가 배부른 일이었다.
석달이나 되는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는 연합수련회를 가곤 했다. 그것은 규모가 작은 여러 한인교회들이 한데 모여서 치르는 연합수련회였다. 차를 여섯 시간, 여덟 시간씩 타고도 멀리서 오는 한인교회들도 있었다. 그렇게 여러 주 번호판을 달고 모인 각 교회 차들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보는 데 괜히 마음이 찡했다. 좀 가능성 있는 애들은 부모가 어떻게든 의대 가라고 밀어부치는 통에 부담감이 컸고, 그렇지 못한 애들은 부모의 관심을 받지 못해 사랑에 목말라 했지만, 자신들과 오래 함께하는 사역자는 거의 없었다. 아이들이 익명으로 쪽지에 고민을 적어 붙여두던 창을 읽다보니, 이런 저런 고민들부터해서 자기는 게이인데, 레즈비언인데, 이제 자기는 어쩌냐며 고민을 토로한 것도 보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가족주의 사회인 아시아계 성소수자 사춘기 청소년 자살률은 매우 심각하다) ‘한인며느리’ 원하는 부모에게 ‘남자 며느리’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와 학생들, 직장인들이 함께 한 시간은 짧게 끝나고 말았다. 담임목사가 한국의 큰 교회에서 담임하라고 부른다면서 취임식 한지 일년 여 만에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나도 사의를 표했다. 담임목사가 없는 동안 나 혼자 교회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박사과정 공부 중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점점 더 심해지는 우울증 때문에 아이들과 농구하는 사역자가 못되는 것이 그렇게도 부끄럽다 못해 자기 혐오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아이들과 작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있을만하니 또 급히 떠나버린 그 많은 사역자 중에 하나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