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문법 연구자들은 '부정법(negation)' 또는 '부정문(negative sentence)' 관련 문법 현상을 설명할 때 '~이/가 안/아니', '-지 않/말' 구성을 기본적인 통사 요소로 다루는 게 일반적이다. 서술어 뒤에 오는 부정 형식은 장형 부정의 형이라서 규범적인 문법을 기술할 때에는 부정의 유형 분류의 한 방식으로 ['안' 부정, '못' 부정, '말다' 부정]과 같은 술어를 사용하고 있다. 구조나 기능 중심의 문법 연구자들은 이런 방식의 접근에 익숙할 것이다. 인지 문법에 익숙한 연구자들은 '구문 문법(혹은 '구성 문법', construction grammar)'과 유사한 접근 방식에 익숙할 텐데, 이 방식도 '지 않', '지 말'과 같은 구문 중심의 접근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을 편의상 '1관점'이라고 해 두자.
한편, 구조 분석(parsing)에 관심이 있는 연구자라면 조금 다른 접근을 할 것 같다. 문장 구조 분석(parsing)을 해 보자면 (표면 구조를 중시하느냐 생성적 관점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관점은 다를 수 있겠으나) 대체로 '[ [VP + [이/가]K]KP + [안]Neg]NegP' 정도로 분석할 것이다. '이/가 아니', '지 않', '지 말'과 같은 형식을 더 쪼개어 '이/가, 지'가 우선 앞에 있는 서술어(구)에 통합하고 여기에 다시 부정의 의미를 가진 어휘가 통합한다고 보는 관점을 취하는 것이다. 통사론의 기본 단위가 단어 혹은 단어에 준하는 통사 원자라는 관점을 수용한 분석이다. 이런 관점을 편의상 '2관점'이라고 해 두자.
어떤 관점이 우리의 두뇌가 실제로 언어를 처리하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을까? 두뇌의 신경 세포들의 연결 지도를 상세하게 그려서 꼼꼼하게 뜯어볼 수 없다는 현실의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면 이 문제는 추정의 영역에서나 다룰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관점'과 '2관점' 중 어떤 관점이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실재에 보다 더 근접해 있는지를 어느 정도는 타진해 볼 수 있다. 발화 오류 사례를 통해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면 어떨까?
글로는 여간해서 접하기 어려운 발화 실수 중 하나는 '말-'부정의 실수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무언가를 읽는 행위를 하다가 '-지 말자'라고 써야 할 곳에 '-지 않자'라고 쓰여진 글을 접한 경험이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을 할 때에는 그런 실수를 종종 접한다. 특히, 즉석 연설이나 즉석 인터뷰 등과 같이 원고 없이 어떤 말을 하는 상황에서 그런 실수를 접하게 된다. 생방송 중에 간혹 그런 실수를 보게 되는데 아래 두 가지 사례가 있다.
(1) "부연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뭐 외국인의 입국이라든가 이런 거에서 유연성을 갖지 않자는 취지가 아닙니다." (클립 24초부터)
(2) "그(?)까 인제 낭비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는 별도로 제도적인 다른 대책을 이제 마련해야 되는데, 낭비를 뭐 막지 않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클립 15초부터)
이런 오류를 접할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점은 한국어 탑재 두뇌가 부정의 의미를 언어로 산출하는 정확한 과정에 대한 것이다. 위에서 제기한 질문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정작 위 오류 사례를 보면 우리의 두뇌에서 일어나는 통사 처리는 특정 구성(혹은 페턴)을 이용하는 방식과 구문을 분석하는 방식이 동시에 적용되는 것 같다. 만약 '지 말자'를 '*지 않자'라고 하려면 적어도 '지'와 '말다'가 분석된 단위라야 한다. 직관적으로는 '2관점'이 보다 타당해 보일 수 있다. (앞 문장을 쓰면서 마지막에 '보일지 모른다'로 쓸지를 두고 찰나를 고민(?)했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은 우리의 문법적 직관에 따른 또 다른 의문이다. 위에서 본 오류 사례처럼 '지 않' 방책에 따른 언어 처리가 일어났다면 왜 '지 않'이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어 청유형 종결어미 '-지'를 사용하는 오류를 일으키는가? 아래 '(3)갖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가 아닙니다, (4)막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처럼 오류를 충분히 피해가는 문장을 이어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2관점'과 같은 순차적 통합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는 어렵다. (이론적으로는 순환신경망(RNN)을 이용한 자연언어처리의 한계와도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3) 부연하자면, 그렇다고 해서 저희가 뭐 외국인의 입국이라든가 이런 거에서 유연성을 갖지 않아야 한다는 취지가 아닙니다.
(4) 그(?)까 인제 낭비 문제를 이야기하는 거는 별도로 제도적인 다른 대책을 이제 마련해야 되는데, 낭비를 뭐 막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
1관점의 문법 이론은 발화된(혹은 쓰여진) 문장의 문법성을 판단할 수는 있어도 문장의 생성이나 이해 과정을 들여다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2관점은 '생성'의 관점에서 출발한 이론이지만 한국어 연구자들의 경우에는 추상성을 거부하고 '표면 구조 분석'에만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Chomskian의 생성적 관점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생성 과정에 대한 설명은 차치하더라도) 위에 제시한 (1), (2)와 같은 비문이 생성되는 과정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두뇌의 실제 언어 처리 과정을 반영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표면 구조 중심의 분석적 관점은 생성 과정에 대한 이해 자체를 포기한 분석법이다.
위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은 네 가지다. 부정에 관한 것, 완형 보문에 관한 것, 부정 의무 표현에 관한 것, 청유법에 관한 것.
부정에 관한 지식
행위 뒤에서 행위를 관념적으로 부정하는 기능(<Neg>)을 표상하는 언어적 책으로 행위 서술어에 '지'라는 어미(보문자)를 붙인 후에 '말'이나 '않' 중 어느 하나를 사용할 수 있다. 두 후보 방책 중 '말다' 책략은 '행위'를 '금지'하는 <금지 부정>이기 때문에 하는 행위 유발을 촉구하는 <청유>의 관념과 '행위'의 관점에서 통일성 있게 어울릴 수 있다. 그래서 문장 종결 어미 '-자'와의 통합이 자연스럽다. 이에 반해 '않다' 방책은 명제나 상황에 대한 부정으로 문법적으로는 형용사성과 관련된 부정을 표시할 때 사용되는 방책이라서 행위와는 관념적으로 잘 어울리지 못하는 제약이 있다. 그러니 청유형 종결 어미 '-자'와의 통합에 제약이 따른다.
완형 보문에 관한 지식
'말, 이야기, 취지, 뜻, 제안' 등의 명사의 내용 자체가 <청유>인 경우 'V자(고 하)는 N('이야기, 말, 소리, 취지, 뜻, 것, 제안 등)'과 같은 소위 완형 보문(동격 관형절)을 사용한다.
<부정 의무> 표현에 관한 지식
당위, 의무의 내용이 행위의 부정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V지 말아야 하'와 'V지 않아야 하' 둘 다 사용할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완형 보문의 피수식 명사(말, 이야기, 취지, 뜻, 제안 등)의 내용 자체가 <금지 행위>인 경우에는 <금지 청유> 표현인 'V지 말자는 N'과 <의무> 표현인 'V지 않아야 한다는 N'이 통용되기도 한다. 이런 설명은 기존의 문법서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지만 아래 예에서 보듯 충분히 타당해 보인다.
예) 아무도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말/그러지 말자는 말/그렂 않아야 한다는 말}을 선뜻 하지 못했다.
청유법에 관한 지식
청유형 문말 어미 '-자'는 동사와만 통합하고 형용사와는 통합하지 않는다. '예쁘자, 착하자' 등은 어색하다. 부정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부정 표현은 '말다'와만 어울린다. 그래서 'V지 말자'는 자연스럽지만 'Adj지 말자, Adj지 않자'는 어색하다.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을 언어로 표상하거나 이해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이를 언어의 선조성(線條性, linearity)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1), (2)의 경우 '갖지, 막지'까지 발화한 시점에서 우리 머리 속에 위 네 가지 지식이 동시에 떠올랐다가 특정 지식을 우선 선택하여 처리하는 과정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절차를 전제하면 발화 실수가 일어나는 과정을 어느 정도 추리해 볼 수 있는 설명방법이 생긴다. 다음을 보자
좌측 그림은 알파고의 처리 과정을 도식화한 그림에 아주 서툰 몇 가지 표시를 더한 것이다. (1), (2)와 같은 발화를 하는 과정에서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갓-, 막-'까지 발화한 시점에서 이어질 발화를 생성하는 과정은 어쩌면 좌측 그림과 같을지 모른다. 행위는 동사 '갖- 막-'으로 표상했고 그 행위의 유형을 판단하는 단계에서는 <금지 청유>로 표현해야 한다는 처리를 한다. 다음 이에 해당하는 언어 표현 목록(사전?)을 검색하면 다양한 표현이 있다. 그 중에서 어떤 이유에서인지 '-지 않-'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위 네 가지 지식을 검색해서 가장 적절한 문법 지식을 선택하는 'V' 단계가 된다. 이 단계에서 적어도 세 가지 목록을 상정할 수 있다. '지 않아야 한다는 말', '지 말자는 말', '지 말아야 한다는 말'. 그 중에 전 단계의 <금지 청유>의 영향을 받아서 'V'단계에서 '지 말자는 말'이 선택된다. 신경망으로 치자면 가중치가 엉뚱한 영향을 끼쳤거나 모종의 편향이 작용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 발화 실수를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 언어 처리를 수행한 결과 (1), (2)와 같은 문장을 발화했을 가능성을 없는 것일까?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접근이라 실험으로 검증할 방법은 없다. 그래도 이런 과정이 머리 속에서 일어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가정하면서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고 문법 요소의 통사적 정보를 분석하면 어떨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