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력 느껴지는 문법 이론을 위하여
이전에 올렸던 두 글에서 발화 실수를 통해서 통찰할 수 있는 문법 연구의 새로운 학제적 접근 가능성에 대해 암시한 적이 있다. (두 발행글의 링크: 언어 데이터를 통해 직관하는 신경과학, 통사 처리에 특화된 신경 기제에 대한 직관) 이번 글에서는 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배경을 간단히 정리해 볼까 한다.
관찰 분석에 기초한 기술/기능/구조주의적 접근은 언어학을 인문학의 영역에서 철저하게 배제시키려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말이건 글이건 실제로 사용된 발화 중에서 특정 언어의 화자들이 모두 자연스럽다고 인정할 만한 발화들은 그 자체가 유기체적인 언어 현상일지 몰라도 인간의 정신 세계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연구 결과들은 표준적이거나 규범적인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이런 기조에 반발한 촘스키의 최소주의는 인지과학으로서의 언어학을 표방하지만 정작 그 문법 이론이 지나치게 사변적이라서 이론의 근거가 되는 실체가 묘연하다. 분명 '언어'는 내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정신 현상의 결과물이고, 그런 특징에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이전 시대의 언어학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언어학의 지평을 열었다. 학부생 시절 그런 점에 매료되어 언어학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 세계가 구동되는 원리를 엿볼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에 부풀었었다.
내재 문법이나 LAD(Language Acquisition Device, 언어 습득 장치)를 밝히려는 생성 이론의 문장 분석은 아무리 봐도 실체가 없는 상상의 장치들을 이용한 것처럼 보일 무렵, 그러면 인지과학에 대해서 조금 공부를 해 보자 싶었다. 그 후로는 인지-신경 과학의 생물학적 구조와 기능에 관한 연구들을 언어 이론의 토대로 삼으면 생성 이론에서 사용하는 상상적 기제들에 실체를 부여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 데이터 속에 화석으로 묻혀 있는 문법이 아니라 우리 머리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문법을 들여다 보고 싶었다.
한국에서 신경 언어학을 공부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ERP를 이용한 연구들은 외국 연구 성과를 한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반복하는 연구가 되기 십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fMRI 영상들과 함께 이용하는 외국의 연구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거니와, 뇌영상 신호를 처리하는 전문 분야가 따로 있을 정도임에도 해당 분야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는 연구들이 많은 것 같다. (뇌영상 처리 기술과 관련하여 그런 처리가 결코 쉽지 않음은 관련 연구자들은 주지하는 사실이다(fMRI 영상 처리에 관한 문제를 다룬 한 사례가 궁금한 분을 위한 링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인지 현상, 신경 현상에 대한 연구는 개별 뉴런을 자극할 수 있는 방법(이전 글에서 소개한 바 있다)도 존재한다는 사실은 희망적이다. 다만, 아직은 언어 관련 뉴런을 특정해 내는 연구는 아직까지 없는 듯해서 아쉬움이 있을 따름이다.
현대 과학 기술의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언어학과 인지-신경과학 두 분야의 성과를 두루 참조하면서 화석이 되어 가는 문법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발화 실수도 엄연히 두뇌의 인지 처리 결과로 만들어진 발화이니, 이런 발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문법(언어) 처리 매커니즘을 공구(攻究)하되 인지-신경과학 분야에서 쌓아가는 두뇌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성과들을 참조하면서 그 실체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어떨까? 자연스러운 발화이든 부자연스러운 발화이든 모두 머리 속에서 모종의 과정을 거친 결과임에는 분명하지 않은가!!
"말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각(知覺)이라는 불꽃이 어떻게 어린이나 일반 사람들의 정신에 불을 붙여 입 밖으로 말이 나오게 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언어는 신비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기적이다.”—「셈어 연구지」(Journal of Semitic Studies), 맨체스터, 1956년, 1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