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들이 늘 있지만 미루게 되었다. 수업이나 친구들과의 약속도 5분이나 10분 늦게 도착하고 싶지 않았지만 마음먹은 것과 다르게 느려진 정신을 추스르느라 지각하는 게 일상이었다. 늦어진 하루로 학업도 순탄치 않았다. 대학원에서 졸업 전 논문자격시험을 같이 합격한 친구들과 동시에 졸업장을 받고 싶었지만 그 이후로도 나 혼자 6년이 더 걸렸다.
매일 하루를 시작하는 일이 남들처럼 쉽지 않았다. 나에게는 힘이 없었다.
그래서 정말로 꼭 마음속으로는 정말 끝내고 싶어도 이유 모를 통증으로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하루 온종일 머리를 찌르는 두통이, 다음에는 위염이 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기력해져서 멍하니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숨을 쉬기가 힘든 때가 종종 있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다가도 많은 사람들을 보면 갑자기 내려야 했다. 다음 차를 기다렸다.
그다음 열차의 문이 열려도 괜찮아지지 않으면 도착한 열차를 여러 번 보내고 다시 기다렸다.
나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이 무엇에 대해 며칠을 고민하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정신건강의학과에 전화해보았다. 예약한 후에도 한 달을 기다려야 했다.
살면서 처음 들어간 곳에서 질문지를 작성하고 상담 후 일주일 뒤에 받은 결론은 우울증이었다.
우울증, 공황장애, 번아웃 등, 내가 겪은 모든 아픔들의 첫 증상은 힘이 없다는 것이다.
혼자서는 힘을 내는 일이 어려워서,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되는 실패 끝에 나를 일으켜줄 도움을 비로소 구했다. 꾸준히 병원을 다니고, 정해준 약을 먹고, 의사 선생님과 현재 나에 대해 얘기를 하고 겨우 8년 만에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물론 밖으로 내 상황을 알릴 용기도 없고 힘이 없어서 모두와 연락을 끊고 그저 하루씩 버티기만 나날들이 꽤 길었다.
지도교수님의 관심과 도움으로 겨우 석사를 끝내고 바로 다음 해, 프랑스로 유학을 왔다.
어학원을 다닌 지 1달 반 후, 코로나로 인해 예상과 다른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지만 코로나로 학교에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게다가 뒤늦게 배운 프랑스어로 철학을 배운다는 것은 당연히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더 쉽지 않았다. 그 사이, 8개월 동안 보통의 체격에서 7kg의 살이 빠지고, 위염으로 커피를 마실 수도 없고, 불면증과 두통이 다시 돌아온 우울증의 신체화 증상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전처럼 힘이 없던 시간들이 프랑스에서 반복되었지만 이번은 4년이 아닌 9개월, 그 이후에는 한 달만에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우울증은 주기적으로 나를 찾아왔지만 전보다는 빨리 내 일상을 꾸려갈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하루의 시작은 어렵고 꽤 오랫동안 실패가 있었지만 멈추었던 발걸음을 조금씩 움직여갔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는 일은 나의 한계를 체감하고, 한계에 부딪히는 하루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여전히 힘없는 하루를 보내기도 하고 반대로 공부로 하루를 채우기도 한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하다.
왜 힘이 없어도 계속 공부하는 것일까? 누가 나에게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저 살기 위해서 하게 되는 것이라고 답하겠다.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잘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트레스에 잠을 못 자도 다른 길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환경을 바꾸어서 프랑스에서까지 가서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지금과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겠다. 나를 바꾸기 위해서 가장 먼 곳에서. 새로운 환경에서 온전히 살아내어보고 싶었다.
배운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 변화를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내가 새로 자라날 공간을 열어두어야만 했다. 공부는 성장하는 과정이고 외부에 열린 전제로 살아가야한다. 변화는 타인과 우연한 만남을 전제로 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이 자라난 나를 타인과의 마주침과 그로 생긴 깨달음들로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