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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B Nov 26. 2022

크로와상으로 전해지는 마음

프랑스 대학 수업에서 일어난 일

이번 주 금요일은 기술철학 수업의 4시간 연강이 있었다. 기술과 중독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는 선생님은 특히 11월에 몰린 학회 일정 때문에 바쁘셨다. 그래허 특별히 이번 주는 2주간의 수업을 오전에 몰아서 하기로 되어있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선생님은 피곤해 보이셨다. 오늘은 8시 즈음에 시작하는 강의니  바쁜 하루 중에도 강의자료를 충실히 준비하셔야 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일정에 따라 빨리 일어났어야 했던 나도 마찬가지로 졸음을 이기고 있었다.


하지만 PPT를 읽는 선생님의 말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당황한 목소리로 화면의 글이 잘 안 보인다는 것이었다. 재차 글을 읽으려 했지만 글씨를 읽을 수 없었던 선생님의 어려움을 눈치 빠르게 알아챈 어느 학생이 대신 화면에 적힌 인용된 텍스트를 매끄럽게 읽어 주었다. 하지만 다음 화면에서도 선생님은 여전히 글을 읽을 수 없었고 마치 제자리에서 쓰러질 듯 보였다.


평소에 열정적으로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은 결국 오늘은 앉아서 수업을 할 테니 양해해달라고 말했다. 앉아서 하는 수업이 익숙하지 않았던 선생님은 원대로 설명하기 위해 결국 일어섰지만 얼마 못가 5분 동안 잠시 휴식을 가지겠다고 말했다. 지금은 당이 부족하니 어쩔 수 없으면 콜라라도 사마시겠다고 한 말에 모두 웃었다. 선생님은 결국 펩시콜라를 사 와서 조금 마시고 수업을 재개하려고 했다.


짧은 시간에 액상과당으로 혈당을 높여주어서 문제가 되는 콜라였지만 선생님에게는 바로 그 부작용이 필요했다. 마침 수업 내용도 파르마콘(pharmakon), 플라톤이 언급한 약이면서 동시에 독약인 파르마콘이 주제였다. 모두 다 선생님이 들고 있는 파란 콜라캔이 이번에는 파르마콘처럼 역으로 선생님에게 활력을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5분의 휴식마저도 선생님께 충분치는 않았다. 생각을 거듭한 후에 선생님을 20분 동안 쉬기로 하고 그 이후에도 괜찮지 않다면 수업을 끝내겠겠다고 말했다. 반에 모인 이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당황스러운 분위기를 바꾸러 학생들이 던진 질문이 재밌었는데 선생님도 프레파(Prépa)를 준비하셨냐는 질문이었다. 같은 날 오후 1시 반에 있을 교사 자격 시험인 아그레가시옹(agrégation) 준비반 수업도 듣는 학생들이 물어본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고교 교육을 마치고 그랑제콜에 진학하기 위해서 2년의 준비과정인 프레파를 거친다. 2년 동안의 준비과정은 하루 종일 수업과 작은 시험을 보며 대비하며 당일의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치열한 공부 과정을 거친다. 문과든 이과든 그랑제콜에 합격한 이들은 최고의 엘리트로 인정받고, 학교에 진학하는 동안 정부 장학금을 받는다.


선생님은 자신도 프레파에 떨어졌다는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고3을 마친 후 대입을 위해 선택한 전공은 애초에 과학이었다고 한다. 칸트는 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철학하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매 수업마다 철학적 세계와 탐구의 매력을 보여주었던 선생님이 처음에는 철학에 관심이 없던 공학도였다는 사실에 모두 다 놀랐다. 멋진 신세계를 보여주던 이 선생님을 작년에는 자신의 태양으로 부르던 추종자들도 있었다.


선생님은 공학 그랑제콜, 에콜 앙제니외르(Ecole d'ingénieur)에 들어가기 위해 엄청 노력을 했지만 한 번 떨어졌다고 했다. 결국 진학하고 2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한 후 갑자기 철학이 하고 싶어서, 철학으로 개종(conversion)했다고 말했다. 학사 1학년부터 철학을 선택해서 지금 이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철학의 최고 명문인 고등사범학교로 편입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공학 그랑제콜에 입학하기에 그리도 어려웠던 길이 철학을 선택하고서는 순탄했던 것이다. 20분의 여유로운 쉬는 시간은 걱정보다는 놀라움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흥미로운 이력을 가진 선생님이 공학자였던 사실에 멋지다고 대답했던 그 학생이 선생님께 다가와 양손에 든 크로와상 중에 하나를 건네주었다. 몇 분 후에 또 다른 학생이 크로와상과 주스를 건네주면서 이 크로와상이 맛있다고 말했다. 나는 눈으로만 걱정했지 직접 빵을 전해줄 생각을 못해서 내심 부끄럽기만 했다.


선생님이 앉아서 쉬는 동안에 잠을 잘 못 자고 아침을 못 먹었다는 소리를 하면서 앞으로는 잘 먹겠다고 했는데 두 명의 학생들이 그걸 놓치지 않았다. 먼저 받은 크로와상 하나를 먹고 있던 선생님의 웃음을 보니 안심이 되었고 무엇보다 선생님을 걱정하는 따뜻한 마음 덕분에라도 기운을 차린 듯했다. 11월의 한기로 추웠던 교실이 그 순간은 훈훈해진 것 같았다.


나도 눈이 잘 안 보이고 쓰러질 뻔한 일을 몇 번 겪은 적이 있었다. 선생님께 혹시 모르니 경동맥 검사를 해보라는 말을 수업 끝나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크로와상과 사과 주스가 선생님에게는 부족했던 휴식과 삶의 온기를 모두 전해준 것 같았다. 선생님의 환한 미소를 보며 피곤한 몸과 마음에 필요한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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