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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B Oct 22. 2023

나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

우울하지만 공부할 수 있는 이유

올해는 수없이 많은 일들이 지나가고 어떤 일은 반가웠지만 다른 일은 예상치도 못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특히 할머니를 떠나보낸 일 이후에 우울증이 나도 모르게 심해졌다. 처음에는 자연스러운 슬픔이라고 생각했지만 논문 작성을 다음 해로 미룬 이후에도 나는 사람들을 만나도 새벽 6시까지 잠을 못 자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두 시간을 겨우 잤지만 세 번이나 깨어났다. 식욕도 완전히 사라졌다. 배고파지겠지 하면서 기다렸는데 오후 4시까지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많이 걸어 다니면 괜찮아질 거야 하면서 하루에 22,000 여보를 걸었는데도 허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침대에서 나오기도 힘든 상태였다. 그럼에도 우울증이 다시 온 걸 못 느끼고 있었다니 내가 생각보다 둔감했던 것 같다. 그래서 프랑스에서도 문을 두드리기로 결심했다. 프랑스 주치의에게 연락해서 할머니 이야기를 하고 정신과 약 두 종류를 받사오니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학교 심리상담도 신청했다. 일반 심리 상담은 시간당 60~70유로(약 85000원에서 10만 원) 하는데 학교에서 운영하는 심리상담센터는 학생들에게 무료로 심리상담을 제공하기에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어서 상담을 예약했다.


심리상담가는 내게 어떤 말이라도 해도 좋다고 했다. 그 말이 마치 마법의 주문처럼 들려서 나는 그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했던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가 그립다는 나의 말에 상담 선생님은 그저 존재하는 방식의 변화가 있을 뿐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우리가 기억하는 한 언제나 기억 속에서 존재한다고 말이다. 한국에 계신 정신과 선생님은 파리와 서울의 거리가 수평으로 더 멀었지만 어쩌면 할머니는 나에게 수직적으로 더 가까이 계실 수도 있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조금 할머니를 떠나보내는 방법을 조금 배운 듯하다.


프랑스식으로 우울증을 치료받기도 한국 식으로 우울증을 치료받기도 하는 이제 잠을 잘 수 있으며 배고픔을 느낄 수도 있고 어제는 라즈베리 잼으로 스콘을 만들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늘 요리 재료를 실험하는 나는 충동적으로 라즈베리 잼을 스콘 반죽에 넣어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내가 만든 스콘 중에 가장 맛있고 풍미 좋은 스콘이 탄생했다. 인생은 라즈베리스콘 같이 의외의 곳에서 더한 행운이 오기도 한다.

물리적으로 힘이 없을 때도 내게는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할머니를 매일 그리며 울면서 몸에도 힘이 없던 무기력의 순간에는 파리 지하철 문도 못 열 정도였다. 그 순간에 빨리 나 대신 문을 열며 고맙다고 말하는 나에게 윙크를 보내던 20대 초반의 여성의 얼굴을 잊지 못한다. 청강하는 교실을 찾지 못해 헤매는 도중에 만난 고등사범학교의 학생 덕분에 문을 열고 수업을 무사히 들은 적도 있었다. 그때도 문을 찾지 못했지만 그가 나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


나에게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곳곳에 있었다. 정작 논문은 보내지 못하고 친구들에게 교정받은 9쪽의 글과 100쪽이 넘는 한국어와 프랑스어가 섞인 논문 습작파일과 수없이 손으로 고친 목차를 사진으로 찍어 보내면서 지금은 잠을 못 자고 힘든 상태니 하고 싶어도 힘이 없어서 이번에 논문을 못 내겠다고 매우 뒤늦게 보낸 메일에 나의 지도교수는 잊지 못할 말들을 전해 주었다.



소식을 듣고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며 하루빨리 쾌유하셔서 잠을 잘 주무시고 건강을 되찾으시길 바랍니다.

저도 할머니를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당신과 마찬가지였죠.

도서관에 가면 제 책 두 권을 주문할 수 있어요.

 

" 사이보그 철학(Cyborg Philosophie, 2011)"에는 아기, 어른, 할머니의 세 가지 할머니 사진이 있습니다.

" 거의 인간에 가까운 (Les Presque Humains, 2021)"의 결론에는 제가 이 책을 쓴 이유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할머니를 위해서라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아마 궁금하실 겁니다. 이 구절들은 조부모님이 우리를 돕고 우리에게 구조를 제공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할머니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죽음이 당신을 죽이게 해서는 안 돼요. 할머니가 주신 에너지와 사랑을 할머니의 존재를 넘어 여러분 자신의 삶으로 확장할 수 있는 힘을 찾아야 합니다.

 

할머니가 당신을 통해 살아갈 수 있도록 하세요.

그녀는 당신의 일과 프랑스에서의 삶과 연구를 매우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이번 주 파리에 있지는 않지만 당신을 생각하고 있어요.

편지를 보내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려주세요.


2023년 9월 11일에 받은 이 편지는 당시에는 너무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 무슨 말인지 모르고 나의 친구 나탈리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나의 지도교수를 학부 시절부터 알던 그는 이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처음 보는 심리 상담가 선생님에게도 이 편지를 보여줬다. 선생님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나는 그 이후에야 이 편지를 다시 읽고 선생님처럼 할머니의 관계를 잊지 않으면서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선생님이 "사이보그 철학"에 쓴 할머니에 대한 글을 반절 읽고 나는 눈물이 흘러서 계속 읽지는 못했다.


주위의 격려 속에서 나는 힘을 얻어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학업을 이야기하는 나를 관찰하면서 심리상담사 선생님은 나에게 "당신은 공부를 정말 좋아하네요"라고 말했다. 나도 그 정도인지 몰랐지만 프랑스에서 자유롭게 선생님들과 이야기하면서 배우는 바가 많고 특히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 흥미로운 주제가 많고 선생님들도 대단하다고 말하는 도중이었다.


우울하지만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공부를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다른 이의 시선을 통해서 뒤늦게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혼자 생각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궁금한 것이 생겨 질문을 하면 바로 답변을 해주고 다음 주에 더 정리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는 선생님들과의 대화에서도 즐거움을, 철학과에서 사귄 친구들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순간들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화 상대인 할머니와 바로 대화는 못 나누겠지만 할머니는 내게 수많은 문을 열어주는 사람들을 보내주는 것 같다. 나는 이 순간들을 비로소 힘내어 온전히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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