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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 Apr 24. 2024

넌 조용히 내 무릎에 앉아 슬쩍 졸리운 듯 눈을 감았지

넌 조용히 동그란 눈으로 나만 하염없이 보고 있었지
무지개 담요도 작은 방울도 너에겐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넌 나 가는 줄도 모르고 또다시 너 아픈 줄도 모르고
그렇게 손을 내게 건네줬어 
내 기억만을 쫓아 널 돌아보지 못한 내게

넌 조용히 내 무릎에 앉아 슬쩍 졸리운 듯 눈을 감았지
그 작은 떨림을 따스한 온기를 얼어있던 나에게 주려 한 걸까

넌 나 가는 줄도 모르고 또다시 너 아픈 줄도 모르고
그렇게 손을 내게 건네줬어
내 기억만을 쫓아 널 돌아보지 못한 내게

고양이와 나 / 캐스커


이 연재에 '고양이와 나'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캐스커의 노래 때문이다. 20대 초반에 즐겨 들었던 노래. 고양이가 내게 없었던 시절 습관처럼 흥얼거리던 노래. 하지만 한 번도 가사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노래. 이 경쾌한 멜로디 속에 숨어 있던 이별의 냄새를 그때 나는 어떻게 조금도 느끼지 못했을까.


그때는 내게 우엉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 빨래 바구니는 짙은 갈색 라탄을 엮어 만든 바구니다. 빨래가 보이지 않게 뚜껑을 덮어서 사용하는데, 습기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가운데에 구멍이 도넛처럼 나 있다. 며칠 전이었을까, 일을 끝내고 나오던 중에 그 뚜껑을 보고 우엉이가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이라고 여겨 발을 피했다. 그러다 우엉이가 이미 두 달 전에 무지개 다리를 건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이건 그냥 빨래 바구니 뚜껑이었지. 사실은 처음이 아니었다. 벌써 몇 번째 똑같은 행동을 하고 똑같은 생각을 했다. 기억이 사라진 것도 아닌데, 조금 우스울 정도로 현실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느리다.


하지만 이제 이런 생각을 해도 곧장 눈물이 흐르지는 않는다. 몇 편의 글을 쓰는 동안 이별을 받아들이게 되었나 보다.


이 글을 처음 시작했던 이유는 애도를 위해서였다. 내가 우엉이에게 해준 게 너무 없어서, 녀석이 떠나간 후에도 슬픔이 내내 나를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해야 할 일도 있고, 아이도 있었다. 일상을 유지해야 할 이유들이 참 많았다. 그나마 재택으로 업무를 처리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뭔가 상징적인 행위가 필요했다. 장례식보다 길고 오래도록 지속할 수 있는 것. 글쓰기가 떠올랐다. 내게 가장 익숙한 방식의 애도. 그것이면 충분한 시간 동안 슬퍼해도 되겠구나. 그렇게 시작한 글이다.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몇 가지가 더 있다. 나는 그토록 생생하게 살아있던 우엉이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의 기억 속에만 우엉이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우엉이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 그것이 이 글을 쓴 두 번째 이유다. 누군가가 우엉이의 이름을 불러주었으면, 우엉이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서 내가 녀석을 잊는 순간에도 누군가 우엉이를 기억하고 떠올려줬으면, 그런 마음이었다. 혹시나  일상에 떠밀려  녀석의 생각을 하지 않는 순간이 오더라도 다시 이 글을 꺼내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별하는 순간까지 우리의 시간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러려고 쓴 글이다.

사실 이 챕터에 들어오니 다시 글을 쓰고 싶지가 않다. 지리한 욕심이다. 나는 우엉이가 죽고 나서야 우엉이가 많이 아팠다는 것을 알았다. 정기 검진도 오랫동안 미뤘고, 바쁘다는 핑계로 이를 닦는 것도 게을리했다. 특별한 징후는 없었다. 아니, 그것을 징후라고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엉이는 종종 화장실이 아닌 곳에 변을 보았고, 종내에는 매일 현관에서 일을 보기 시작했다. 자동 화장실을 잠시 사용하면서 생긴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거의 매일 설사를 했지만 우엉이는 처음 카페에서 데려왔을 때부터 난치병인 트리코모나스를 앓고 있었다. 모든 고양이들이 같은 사료를 먹고 있었기 때문에 감염이 된 것이리라. 여러 약을 번갈아 먹였지만 차도가 없었다. 국내에서는 치료약이 없어 우엉이는 늘 무른 변을 봤다. 설사는 우리에게 특별히 위험한 신호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 모든 것이 징후였을지 모른다. 방광염에 걸렸던 3살 무렵을 제외하고 화장실이 아닌 곳에서 볼일을 보지 않던 우엉이가 현관에 배변을 한 것도, 설사가 계속되었던 것도, 식욕이 전만 못했던 것도, 마지막을 예고하는 신호였을지 모른다. 나는 내 일상을 쫓느라 녀석의 작은 신호들은 눈여겨보지 않았다. 지독한 냄새가 나는 무른 변을 치우는 것을 귀찮아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좋은 주인이라고 자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두 의미 없는 후회다. 우엉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다. 녀석은 내게 조금의 염려조차 남기지 않고 떠났다. 사실 나는 꽤 각오를 했었는데. 이제 제법 나이가 든 녀석의 병수발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마지막이 다가오면 녀석을 어떻게 돌봐줄지 그런 생각들을 종종 하곤 했는데, 우엉이는 내게 지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것은 조금 원망스럽기도 하다.


남편이 있어서, 아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적어도 나 혼자 우엉이를 추억하지 않아도 됐으니까. 10년을 함께 키웠던 남편과 함께 우엉이를 기억 속으로 다시 부를 수 있었으니까. 실제로 우엉이가 떠난 후에 우리는 함께 출근을 하다가도 차 안에서 이유없이 오열을 했다. 계기는 아주 사소했다. 남편은 잔나비의 ‘주저하는 연인들을 위해’라는 곡을 들으면 우엉이가 떠오른다며 울음을 터트렸고, 남편의 말을 들으니 나도 우엉이가 떠올라 울음이 터졌다.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랑 노래일 뿐인데, 그저 해가 너무 밝을 뿐인데, 이유 없이 툭툭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날들이 이어졌다.


내일이 아니라 어제만 생각하는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개를 키웠던 사람들은 더 자주 슬프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양이는 영역동물이라 집 밖을 나서면 흔적을 마주할 일이 없지만, 산책을 다니는 개들은 곳곳에 추억이 깃들어 있을 텐데 그 설움을 어떻게 견디나. 혼자서 반려동물을 키우다 떠나보낸 이들이 가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긴 시간 반려동물과 함께 나눈 추억들을 함께 공유하고 되새길 사람이 없는데 혼자서 울면 슬퍼 어쩌나.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사람들을 떠올리곤 했다.


내가 아는 우엉이를 남편이 알고, 아이가 알고 있어서, 같은 상실을 공유하고 있어서 견딜 수 있었다.


이 이별을 나 혼자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나의 애도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애도가 끝나면 나는 웃으며 너를 떠올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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