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잠긴 이름들

제주 4.3 답사 두 번째 밤

by 오늘


내내 잠을 설쳤다. 새벽 5시에 일어나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먹고 어제 걸었던 길을 거슬러 관덕정과 제주북초등학교를 다시 걸었다. 숙소로 돌아와 아침 8시께 겨우 다시 잠에 들었다. 우렁찬 에어컨 소리에 완전히 깬 시간은 10시, 아직 다 읽지 못한 소설을 얼마간 읽다 버스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섰다.


오늘 방문할 곳은 주정공정수용소 4.3역사관. 희생자의 기록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던 장소라 유적지를 방문한다는 감각이 보다 생생하다. 바다 냄새는 곳곳에 등천하지만 바다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숙소에서,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해변이 보이니 조금 마음이 트이는 것도 같다. 00 마씸? 버스 기사님께서 승객들을 향해 묻지만 육지에서 온 나는 제주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주정공장 수용소 4.3역사관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것은 추모의 방이다. 추모의 방은 4.3 사건 당시 제주에서 생사를 알 수 없거나 혹은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옥살이를 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행방불명된 3,994명의 영혼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안내문 발췌)


벽 한 면에서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화면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의 이름이 하나씩 떠오른다. 송대길, 김시흑, 김시인, 김백연, 김옥배, 김임배, 김옥윤, 김윤원, 김용운, 김용해, 김재봉..... 할 수만 있다면 이곳에 있는 이름을 모두 건져내고 싶다. 같은 성씨와 같은 같은 돌림자, 같은 거주지가 그들이 가족임을 증명한다. 생년이 1930년 이후인 이름들이 화면에 떠오를 때면 유난히 숨이 탁탁 막힌다.


채 스물을 넘지 못하고 숨을 거둔 이름들. 덜 슬픈 죽음이 어디 있으랴 만은 주어진 생의 절반도 채 살지 못한 목숨들이 아까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추모의 방에서는 바닥을 디딜때마다 주정공장 수용소에 갇혔다 육지형무소로 끌려간 분들이 가족에게 보낸 글귀들이 떠오른다.



4·3 당시 주정공장 창고는 귀순자들의 수용소로 쓰였다. 겨울을 산속에서 버티다 살아남은 이들이 봄이 되자 대거 하산하면서, 경찰이나 군부대에 인계된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으로 모였다. 제주 읍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수용 장소가 바로 이 주정공장이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한데 모였고, 부상자와 임산부조차 따로 구분되지 않았다. 창고 안의 환경은 참혹했다. 고문을 당한 뒤 끌려온 이들도 많았고,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가는 사람도 이어졌다. 수용소 안에는 경찰 특별수사대가 상주하며 연일 취조를 벌였고, 특히 청년층은 재판에 회부되어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한국전쟁 직후 집단으로 희생당했다. 때로는 주정공장 앞 제주항 바다에 수감자들을 수장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주정공장 창고는 단순한 수용소가 아니라, 당시 국가 폭력이 가장 집약된 장소 가운데 하나였다. (출처 : 4·3 연구소, <제주4·3유적Ⅰ 개정증보판>(2018), 4·3 연구소, <4·3 길을 걷다> , 4·3 평화재단 <제주 4·3 아카이브>, 제주다크투어 홈페이지 참고)



지하 1층에는 제주도 지도에 4.3 사건 당시 사망자 수를 촌락별, 색상별로 구획화 한 지도가 한쪽 벽을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표기된 숫자는 한 부락과 한 부락을 더해갈 수록 아득하게 많아져 세기를 포기하게 된다.



생존자분들의 인터뷰 영상을 차례대로 보고 있는데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입구에서 마주쳤던 문화해설사 고영수님이셨다. 혹시 영상을 더 보고싶으신가요? 아, 네.. 볼 수만 있다면 감사하죠. 예상치 못했던 친절에 당황하는 내게 해설사님께서는 인자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지켜보고 있는데 4.3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서요. 이 더운 날씨에 오셔서는.


오는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해설사님의 옅은 미소에 구름처럼 흩어진다. 끔찍했던 역사 속에서도 유구히 그랬듯 다정함은 많은 것을 구원한다.


제주 4.3 사건에 전말에 대한 영상과 유족들의 구술 영상을 모두 보고 난 후 고영수 문화해설사님께 짧은 인터뷰를 청했다. 4.3이 정치적인 담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경계하시는 듯 했으나 염려했던 것이 무색하게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상세히 안내해 주셨다.


(편의상 인터뷰 채록에서 고영수 문화해설사님은 ‘고’로, 필자는 ‘배’로 표기.)


고: 둘러보시면서 여기에 관련된 거 혹시 뭐 의문나는 거 있으세요?

배: 제가 오기 전에 4.3 생활 총서라는 책을 읽었는데 거기에서 주정공장에 수용됐던 분들 이야기가 꽤 많더라고요. 사실 입구에서부터 충격을 받았어요. 돌림자가 비슷해보이는 이름들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고: 그러니까 가족들이 동시에 그렇게 희생되고 그랬던 거죠. 평화공원에 가보면 일가족 지금 이름도 없는 누구의 자 그래서 이름도 지어지지 않은 어린 애도 그렇게 많이 학살 당했던 거죠. 돌림자가 같은 형제 뭐 다섯 형제가 학살당한 그런 일도 있었죠. 4.3 평화공원에 가서 위패 봉안관 둘러보시면 그런 것이 꽤 많이 보일 겁니다.

배: 전쟁 시에도 여성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조금이라도 보호하려는 노력들이 있곤 했는데, 제주를 취재하면서 알게 된 건 아이들이 굉장히 많이 희생되었다는 거였어요. 너븐숭이에도 아기 돌무덤이랑 그런 것이 많다고 알고 있거든요.

고: 그때 당시 초토화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을 싸그리 다 불태우고 그러면서 사람들 보이는 대로 그냥 학살시켜버리고 하는 문제가 있다보니까 어린아이까지도..

배: 제가 본 역사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그러니까 4.3이 전쟁은 아니니까 전쟁을 제외하고 (한국에서)제일 큰 규모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건인 것 같아요.

고: 맞아요. 어떤 경우는 어디 다 모이라고 해 가지고 (도민들이) ‘네’하고 모여가지고 했을 때, 어린아이를 혼자 (집에) 두고 갈 수는 없잖아요. 자녀들도 같이 데리고 가고 그랬으니, 그런 경우에는 그냥 뭐 어린애고 노인이고 한꺼번에 학살당하고 그런 경우들이 있었던 거죠.

배: 도민들 사이에서도 (피해자들이) 좀 배척되거나 그런 경우도 있었을까요?

고: 도민들 사이에서도 일부는, 그러니까 무장대에 의해서 희생당한 그런 사람들인 경우에는 저놈들은 폭도들이지 해가지고 지금도 그렇게 반감을 가지시는 분들도 있죠. 무장대에 의해 대표적으로 희생당한 마을이 남원리 위미리 표선면 성읍리 세화리가 대표적으로 무장대의 공격으로 집단 희생이 있었던 마을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는 폭도들이 저지른 짓이다 해가지고 지금도 어르신들이라던가 의견이 갈리는 경우가 있죠. 그런 갈등 관계가 좀 없지 않아 있어요.

배: 그렇군요.

고: 지금도 평화공원의 위폐 중에 당시 가해자였던 이들도 같이 있지 않냐 하는데, 적극적으로 무장대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평화공원에 희생자로 지금 안 들어가 있기는 하거든요.

배: 복잡한 문제인 것 같아요. 지금은 저희가 이렇게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에는 사실 분단이 되기 전이었잖아요.

고: 그래도 지금은 법으로 정해가지고 희생자들은 규정에 의해 지정되고 그런 상황이니 (이념에 의한 분쟁은) 많이 완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아직도 (학살을 감행했던 주체가 누구였느냐에 따라) 반감을 가진 분도 있을 수 있지.


내가 말했다. 칠성로를 걸어다니다보니 이 도시 전체가 묘지처럼 느껴졌어요. 해설사님이 대답하셨다. 도시가 아니죠. 이 섬이, 제주도 전체가 묘지입니다.


주정공장 수용소 4.3 역사기념관 영상자료 [재판없는 수장과 학살] 중


상술했듯, 고구마를 발효하는 과정에서 생긴 알콜을 수출하던 주정공장은 4.3 사건이 발발한 후 수용소로 사용되었다. 낮이면 고문을 하고, 밤이면 수용자들을 바다로 싣고가 총살 후 바다에 수장을 했다.


4.3 유족 가운데 주정공장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가 있다. 바로 송승문 할아버지다. 해설사님은 특히 송승문 할아버지에 대해 강조해 말씀하셨다. 주정공장 수용소에서 가장 상징적인 존재. 태어난 곳이 수용소였던 아이, 수용소가 고향인 아이.


임신 기간 동안, 송승문 할아버지의 모친은 군경에 의해 '시소'라는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긴 널빤지를 배 위에 올린 뒤 양쪽 끝에 사람이 타고 누르는 모습이 시소를 타는 모양 같다고 해 붙은 이름이었다.


나는 열 달 동안 아이를 몸에 품어본 경험이 있다. 일어나 걷는 것만으로도 밑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을 기억한다. 임산부로서는 견디기 힘들었을 고문, 그 고통을 견뎌낸 것은 어머니만은 아닐 것이다. 태내에서 엄마의 몸을 통해 통증을 경험했을 아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그러고도 그들은 하얀 밥알을 씹어 목구멍으로 넘겼을까. 현재 송승문 할아버지는 4.3 유족회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며 좌우의 대립을 넘어 진정한 화해와 상생의 역사로 닿기를 염원하고 계신다 했다.


무장대에 의해 피해를 입었던 유족들은 무장대를, 군경에게 학살당했던 이들은 군경을 원망해 아직도 제주는 완전한 합일에 닿지 못하고 있다. 이념의 감옥 안에서 달아날 곳이 없었던 이 섬에 어떤 자유가 있을 수 있었을까.


산폭도라 불렸던, 소위 빨갱이라고 칭해지던 좌익 남로당 무장대는 몇 백이었고, 7년 7개월 동안 이어진 4.3으로 인해 사망한 주민은 정부 추산 15,000명, 미군 추산 6-7만 명이다. 당시 제주 인구의 1/10 이상이다. 이 중 78%의 사망자가 토벌대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 숫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총 맞아 쓰러진 어미의 젖을 빨던 갓난 아이는 아이는 빨간 옷을 입고 태어났었나.


돌아오는 길에는 택시를 탔다. 혼자 여행을 다니니 택시를 탈 때마다 기사님들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주정공장 수용소 4.3역사관 앞은 여객선을 타는 항구다. 반대편에서 택시를 잡는 사람은 처음이라고, 어디를 갔다 오시냐 물으셨다. 주정공장수용소 역사관을 다녀와요. 그게 뭡니까? 4.3 사건과 관련된 기념관 같은 곳이에요. 택시 아저씨는 아- 하고 잠시 침묵하시더니, 다소 냉소적인 음성으로 답하신다.


누가 관심이나 있나요.


담수와 용천수가 섞이는 도민만 아는 관광지를 소개해주시는 택시기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나는 관심이 있었던가. 있었다면 언제부터였나. 유명한 연예인이 제주도에 옮겨와 산다고 하던 때 이후였나. 아니면 대통령의 공식적인 사과가 있던 날 이후였나. 아니면, 5.18 문학상에서 왜 제주 4.3 사건에 함께 다루는 것인지 궁금했던 때부터였나.


얼마간 멍한 기분으로 곤을동에 도착했다. 택시기사님도 이곳으로 오는 사람을 처음 태운다던, 4.3이 빼앗아간 마을, 잃어버린 마을 곤을동이었다.



밭곤을을 건너에 두고 반짝거리는 바닷물이 찰랑거리며 드나들었다. 하늘이 눈부셨다. 하필이면 아름다워 멍하니 바다 너머 마을터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물이 고여있다고 해서 붙은 곤을동이라는 이름은 토벌대의 불길에 하루 아침에 사라져버렸다. 67호의 가구가 살아가던 마을은 완전히 불타고, 젊은 사람들은 곤을동 바닷가와 모살불로 끌려가 군인들의 총구에 학살당했다.


초록으로 가득찬 넓은 터에서는 아이들이 뛰어놀고, 때마다 밥 짓는 냄새가 났을 것이다. 물때가 되면 마을의 여자들은 바다에 뛰어들어 미역이며 소라를 건져왔을 것이다. 파도가 높은 날에는 검질(밭일)을 하며 감자와 고구마, 보리를 경작했을 것이다. 어느 집에서는 차려 입고 글을 가르치는 어른이 있고, 마당에서는 웃음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때때로 언성을 높여 다투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 사이로 눈치도 없이 뛰어다니는 강아지가 있었을 것이다.



살아 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곤을동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바닷물을 바라보며, 나도 빼앗긴 그 마을에서 빠져나왔다. 더웠다. 지독할 정도로, 지겨울 정도로, 악을 쓰고 싶을 만큼 볕이 뜨거웠다. 어디서 치밀어오르는 지 모를 화와 서러움이 섞여서 바닥을 콱콱 밟으며 걸었다.


숙소에 도착했다. 몇 가지 저녁거리를 사 객실로 돌아왔다. 스프링소리가 심하게 나는 침대는 경기도 집의 잠자리와 달리 편치 않지만, 그런 것을 불평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해설사님께서 도움이 될 거라고 알려주신 제주작가협회에 연락을 해볼까 수십번 고민하다 연락을 해보았으나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어볼 이야기들은 많았지만,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주정공장수용소 역사관에서 접한 무수한 이미지들과 곤을동을 돌아보는 동안 약간의 정신적 탈진이 있었다. 잠시 씻지도 않고 누워 쉬었다.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어깨에 무엇을 매고 있는 것처럼 피로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내일은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모티브로 한 제주다크투어에 참석하기로 해 절반 정도 남은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아마의 밥을 챙겨주기 위해 P읍으로 가던 경하가 아직도 길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새처럼 가벼운 것들, 무수한 뼈들, 손에 닿아 사라지는 눈송이들. 내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고향 경산으로 닿을 때까지 인선과 경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완독을 하고 나니 12시었다. 적어도 6시에는 일어나야 체크아웃을 하고 오전 9시까지 표선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신경안정제를 먹고도 잠이 오지 않았다. 시계를 볼 때마다 초조해졌다. 내일이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투어를 중심으로 여행일정을 짰으니 그 어느때보다 선명한 정신으로 가야 했다.


바람과 달리 새벽 3시에 겨우 잠들었고,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프로젝트 소개

「노래가 흐르는 바다」프로젝트는 제주 4.3 사건과 여성의 기억을 모티프로 한 창작 동화 작업입니다. 동화의 본편은 추후 공개 예정이며, 현재는 자료 조사와 여행, 인터뷰, 글쓰기 준비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당 작업은 2025년 경기문화재단 청년예술인 자립준비금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지원받은 시간과 자원이 헛되지 않도록 정직하게 쓰겠습니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