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역사 탐방 시리즈 1: 선운각
2022년 북한산 자락 우이동 깊숙한 곳에서 나는 시간의 켜를 처음 만났다.
선운각
현대 정주영 회장이 1967년 “조선왕조의 마지막 기와를 얹어 만든, 왕궁을 제외하고 서울에서 가장 큰 민간 한옥”이라는 이 건물 앞에 섰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무게였다.
기와의 무게가 아니라 시간의 무게
이 건물이 견뎌온 500년이라는 시간,
그 시간 속에 중첩된 수많은 이야기들의 무게.
처음 배우자와 함께 그곳에 갔을 때, 고요한 공기와 북한산 골짜기 옆에 놓인 넓은 한옥이 마음을 붙잡았다.
오래된 마루 냄새와 바람 소리가 어딘가 사람의 숨결처럼 느껴졌다. 그날 이후, 전서체를 배우던 형님, 누님들, 그리고 우당 정경희 선생과 함께 이곳에서 이별 차를 나눴다. 회사 동료를 데려온 적도 있었다.
내게 이곳은 아트포라이프와 백석동천 이후 세 번째 아지트 같은 공간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 번째 방문부터 공기가 달라졌다.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음기 같은 것이 감돌았다.
물론 선운각은 계곡 안쪽이라 해가 늦게 뜨고 빨리 진다. 볕이 닿는 시간이 짧은 자리였다. 그래서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그 이상이었다.
이 장소가 품고 있는 시간의 깊이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되고, 훨씬 복잡했다.
아마 나는 그것을 ‘음기’라고 불렀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곳에 쌓인 굴곡진 시간의 켜, 그 자체였다.
이 건물의 원형은 세종대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을 위해 지어진 안동별궁. 그곳은 왕실의 혈통이 흐르는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이었다. 월산대군이 거닐었고, 혜정옹주가 웃었고, 정명공주가 꿈을 꾸었던 곳.
1882년과 1906년, 두 차례에 걸쳐 순종의 가례가 거행되었다. 고종은 아들의 결혼을 위해 이 별궁을 왕실 직속으로 재정비했다. 조선왕조의 영광이 아직 저물지 않았다고 믿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러나 역사는 잔인하다.
일제강점기, 안동별궁은 이왕직 소유가 되었다.
더 이상 왕실 가례가 열리는 화려한 공간이 아니라,
궁녀들의 거처가 되었다.
왕조의 영광은 사라지고, 그 잔재만이 그곳에 남았다.
1936년, 부지 일부가 민간에 넘어갔다.
1965년, 풍문여자중고등학교 신축을 위해 건물들이 해체되었다. 500년을 한자리에서 버텨온 건물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정화당이라 불리던 건물은 지금의 우이동 선운각으로, 경연당과 현광루는 경기도 고양의 골프장으로. 마치 왕조의 후예들이 한반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진 것처럼.
정주영은 북한산 자락 1만 5천 평 부지에 선운각을 완공했다.
해체되어 옮겨온 안동별궁 정화당의 부재들로 다시 세워진 이 건물은, 명목상으로는 당시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불공을 위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건물의 운명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내연녀 장정이가 요정으로 개업했다.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장안 3대 요정”으로 불리며, 선운각은 대한민국 정치사의 가장 은밀한 무대가 되었다.
정인숙이라는 26세 여성이 한강변에서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되었다.
선운각에서 호스티스로 일하던 그녀의 수첩에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당대 정관계 거물 26명의 명함이 있었다.
그녀가 소지했던 복수여권. 당시 일반인에게는 발급이 거의 불가능했던 그 여권이 의미하는 것.
3세 아들의 친부로 지목된 당시 국무총리의 이름.
나는 선운각 마루에 앉아 북한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건물의 기둥과 대들보는 그날 밤 어떤 대화들을 들었을까. 권력과 욕망, 배신과 침묵.
그 모든 것들이 이 공간의 공기 속에 아직 남아있을까.
박정희 대통령이 연회를 가졌고,
3부 요인들이 드나들었고,
방한한 외국 원수들이 접대받았던 이곳. 한일회담 같은 중요한 외교 협상의 막후 접촉이 이루어졌던 이곳.
10.26 사건으로 김재규가 처형되었다.
선운각은 중앙정보부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1986년부터는 사업가 김일창 씨가 인수하여 한정식집 ‘고향산천’으로 운영했다.
요정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밀실정치의 시대도 함께.
할렐루야 기도원이 84억 5천만 원에 매입했다. 욕망과 권력이 소용돌이쳤던 공간이 종교적인 공간이 되었다. 아이러니한가? 아니면 자연스러운 정화의 과정일까.
기도원 사람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기도했을까.
혹시 이 건물이 품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의 평안을 위해서도 기도했을까.
그런데 하필 할렐루야 기도원이었을까?
할렐루야 기도원.
이름만 들으면 성가대의 화음이 들릴 듯하지만, 그 실상은 한국 기독교계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 중 하나였다.
한때 MBC의 카메라가 그곳을 비췄다.
김계화 원장, 그는 손톱으로 환부를 긁어내며 “성령의 수술”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 성스러워 보이는 행위 뒤에서 매독이 번지고 있었다.
보도가 나가자 기도원은 침묵 대신 군중을 불러 모았다. 오천 명이 넘는 신도들이 MBC 사옥을 에워쌌고,
그 거대한 믿음의 벽 앞에서 방송사는 한 발짝 물러섰다. 결국 사과문이 나갔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2000년 12월. 7년의 공백을 견딘 진실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SBS였다. 매독 감염은 시작일 뿐이었다. 외화 밀반출, 불법 건축, 그리고 더 깊숙이 숨겨진 비리의 잔해들.
신앙의 이름으로 덮인 상처들이 다시 터졌다. 그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선운각은 새로운 주인을 맞는다.
선운각은 다시 한번 변신했다.
이번에는 한옥 카페와 결혼식장으로.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나는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북한산의 능선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옆에 흐르는 계곡 물소리도 들린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500년 동안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이 건물을 지켜본 산들.
카페 안에는 젊은 연인들이 있었고,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있었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있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 ‘이태원 클라쓰’, ‘부부의 세계’ 촬영지로 유명해진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
아무도 1970년 3월 17일의 비극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도 밀실정치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아름다운 한옥과 북한산의 풍광을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공간은 기억을 품는다.
공간은 품은 기억들을 용서한다.
마치 통렌 명상처럼 이 공간은 자신을 거쳐간 어두운 기억들을 품은 뒤 그것을 정화해 깨끗한 기억으로 다시 보내는 것 같다.
1446년 왕실의 영광부터 1970년대 권력의 타락까지,
2000년대 이단 혹은 신앙으로부터 2020년대 일상의 행복까지.
이 모든 시간의 켜가 이 건물 안에 공존하고 있다.
선운각은 더 이상 권력의 은밀한 무대가 아니다.
더 이상 밀실정치의 산실이 아니다. 이제 이곳은 누구나 찾아와 500년의 역사를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문화적 공간이다.
역사적 공간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일까.
과거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선운각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그 이상이었다.
진정한 가치는 과거를 품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
어두운 역사를 은폐하지 않되, 그것이 미래를 규정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
건물에 새로운 생명을, 새로운 의미를,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
500년 동안 이 공간 또는 이 공간을 구성하는 일부는
왕실의 별궁이었고,
궁녀의 거처였고,
요정이었고,
한식당이었고,
기도원이었고,
지금은 카페다.
각각의 시간마다 이 건물은 달랐다. 그러나 동시에 같았다. 북한산 자락에서 사람들을 품어온 공간이라는 점에서.
서울 곳곳에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역사가 지워지고 있다. “옛것”과 “낡은 것”이 동의어가 되어버린 시대다.
하지만 선운각은 증명한다.
역사적 건축물은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통과 현대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과거의 상처까지도 현재의 성찰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떤 유산을 다음 세대에 남길 것인가.
재개발로 번쩍이는 새 아파트들인가, 아니면 시간의 무게를 견뎌낸 이야기가 살아있는 공간들인가.
작가님들께 묻고 싶다. 마지막으로 역사적 건축물을 방문한 것이 언제인지, 그곳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는 이 시대의 어떤 공간을 500년 후에도 남아있을 유산으로 만들어가고 있을지.
선운각의 기와 아래에서,
이런 질문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북한산의 바람이 500년 묵은 기둥 사이를 지나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선희가 부르고 홍석영 선생이 대금으로 불렀던 인연...
선운각에 대한 상세 분석과 근거 자료들은 직전화 참고.
P.S. 역사는 책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 우리가 숨 쉬는 이 공간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앞으로 시간이 허용하는 대로 북한산 주변의 역사를 하나씩 글로 써볼까 생각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