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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구-초안산: 내시들의 산

주의를 기울이면 보이는 것들

by 법의 풍경

며칠 전 첫째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시간이 남아 근처에 초안산을 잠깐 산책했습니다. 예전에 이 산이 서울에서 내시들의 무덤이 제일 많은 산이라고 누가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라 검색해 보니 나름 재미있네요.


서울에서 가장 특별한 무덤들의 비밀

초안산은 산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끄러운 해발 114-115m의 나지막한 뒷동산입니다. 그런데 평범해 보이는 이 작은 산에 조선시대 내시들의 무덤 수백 기가 집중되어 있다고 합니다. 처음엔 단순한 우연으로 생각했는데, 조사해 보니 흥미로운 역사적 배경이 숨어 있었습니다.



왜 하필 이곳이었을까?

Gyeongjoobudo.jpg 성저십리 사잔, 출처: wikimedia

조선시대 '성저십리(城底十里)' 제도 때문이었습니다. 한양 도성에서 십 리(약 4km) 안에는 묘를 쓸 수 없었는데, ‘궁궐 방향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은 도봉산과 초안산 뿐이었습니다. 도봉산은 한성을 지키는 진산이라 금지구역이었습니다. 결국 도봉산의 지맥이 남쪽으로 이어져 형성된 이 산은, 서울 동북쪽에서 가장 적합한 묘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결정적인 발견은 무덤들의 방향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무덤은 남향이나 동향인데, 이곳 내시 무덤들은 모두 서향을 하고 있습니다. 궁궐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죽어서도 왕을 모시겠다는 충성심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풍수지리의 완벽한 조건

초안산.jpg

초안산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형적인 명당이기도 했습니다. 우이천과 중랑천이 양옆을 감싸 흐르는 '수태극' 형상으로, 생기를 가두고 보호하는 이상적인 지형입니다.



계층을 초월한 공동묘지

그런데 초안산에는 내시뿐만 아니라 사대부, 궁녀, 서민 등 다양한 계층의 무덤 1,000기 이상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조선시대 사회에서 신분을 초월한 대규모 공동묘지의 성격을 보여주는 독특한 사례로 향로석(香爐石-향을 피우는 향로를 형상화한 석물) 210기, 문인석(文人石-문신(문관)을 형상화한 석상)과 동자석(童子石-어린 시동 또는 시종을 형상화한 석상) 169기, 묘비 182기 등 수백여 기의 석물들이 시기별로 분포하여 조선시대 묘제와 석 조각 변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숙제

안타깝게도 많은 무덤이 방치되어 있습니다. 내시들이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는데, 혈연관계가 아니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관리가 소홀해진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이전까지도 마을 사람들이 매년 가을에 내시들을 위해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사적 제4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으며, 2013년부터 노원구에서 '초안산 문화제'를 통해 이들의 혼을 기리고 있다고 합니다.



다층적 의미

결국 초안산이 내시들의 주요 매장지가 된 것은 성저십리 제도라는 제도적 제약, 풍수지리적 명당 조건, 그리고 궁궐을 향한 충성심이라는 문화적 의미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작은 발견이 주는 깨달음

짧은 산책에서 시작된 호기심이 조선시대 사회제도, 풍수지리, 그리고 인간의 충성심까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 교실이 되었네요. 우리 주변의 평범한 공간에도 이런 깊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주의를 기울이면 익숙한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새롭게 보입니다.
사물도, 사람도, 관계도, 자연도
경이로움 가득한 하루를 보낼 수 있습니다!


작가님들도 일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흥미로운 역사나 문화 이야기가 있으면 공유해 주세요!


(P.S. 글을 쓸 생각을 산책 마치고 해서 사진을 한 장 밖에 못 찍었네요. 앞으로 좀 더 사진 찍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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