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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도선사, 북한산 자락에 숨겨진 퍼즐

― 창건자는 없고 이름만 남은 사찰

by 법의 풍경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북한산 자락.

지하철 북한산우이역에서 내려 도선사 입구까지 오르는 길은, 그 자체로 도시와 산의 경계다.

이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무 사이로 고요히 숨겨진 하나의 사찰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름은 도선사(道詵寺).

풍수의 대가, 도선국사의 이름을 따 지어진 이 사찰은

겉으로 보기엔 다른 사찰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는 하나의 묘한 모순이 숨겨져 있다.


도선은 이곳에 오지 않았다.

도선은 이 사찰을 짓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도선사는 누구를 기념하고 있는가?”

“도선의 이름은 어떻게 이 산자락에 깃들게 되었는가?”

이 장은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다.


도선사 경내 안내문에도 도선국사가(중략)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라고 표현하여 이를 증명할 수 없는 전설이라는 점을 암묵적으로 이야기한다.

도선사 경내 안내문

1. 도선의 삶과 북한산은 만나지 않았다


앞서 보았듯, 도선국사는 9세기 신라 말기의 인물이다.

그의 활동 무대는 지금의 전라남도 강진, 영암, 해남 일대였다. 그가 출가한 무위사, 수행한 월출산, 남긴 흔적들은 모두 남녘의 산과 바다 근처에 있다.


하지만 서울 강북의 북한산 자락에는 도선의 직접적 활동 흔적이 없다. 그가 북쪽의 산에 절을 세웠다는 기록도, 이 지역을 찾았다는 전설조차 없다.


그런데도 이 사찰은 도선의 이름을 달고 있다.

그것은 기억과 이름이 역사를 대신하는 순간,

즉 실재보다 신화가 더 오래 살아남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다.


청담스님 탑비가 있는 오르막에서 마주친 고양이



2. 도선사의 실제 창건 시기

도선사는 고려시대 사찰이 아니다.

정확한 창건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사찰지와 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후기(18세기 전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도선이 세상을 떠난 뒤 약 800~900년 후에 그의 이름을 기려 지어진 사찰이다. 따라서 도선사라는 공간은 도선이 실제로 세운 사찰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빌려와 세운’ 상징적 공간이다.


왜 조선 후기인가?

조선 전기에는 유교 국가 이념 아래 억불정책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유학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현실에 마주한 민심은 다시 불교의 정신성과 상징체계를 찾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도선 같은 역사적 고승의 명성이 다시 불리기 시작했고, 사찰들은 그의 이름을 빌려 새로운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3. 왜 하필 북한산인가?

북한산 정상 백운대에서 바라본 서울

북한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조선 시대 수도 한양의 배산(背山)이자, 나라의 등줄기로 여겨진 주산(主山)이었다. 이곳은 풍수적으로 국운을 떠받치는 산, 즉 하늘의 기운이 모이는 장소로 해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에 도선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 자체가 기호적 상징이 된다. 비록 도선이 이곳을 직접 찾은 적은 없었지만, 이 자리에 도선의 이름을 새긴다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권위가 강화된다.


풍수의 논리와 명명(命名)


풍수는 기(氣)를 읽는 일일 뿐 아니라, 그 기의 흐름에 적절한 이름을 붙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술이기도 했다. 도선사라는 이름은 단지 ‘누구의 사찰’이라는 소유의 표시가 아니라, “이곳은 도선이 잡은 명당이다”라는 은유적 선언이 된다.



4. 창건자는 없고, 기호만 남은 사찰

'미소'라는 기호 하나가 도선사의 분위기를 180도 바꿔놓는다.

이처럼 도선사는 창건자도, 직접 연결된 역사도 없다.

그렇기에 더욱 흥미롭다.


우리는 묻게 된다:

도선이 오지 않았는데
왜 그의 이름을 붙였을까?


그 답은 하나다.


이 사찰은 기념비가 아니라, 기호다.

기억하려는 욕망,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 돌과 산, 이름 위에 겹겹이 쌓여 하나의 기호적 공간을 만든 것이다.


‘이름 짓기’는 세계 만들기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대상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기억될지를 결정하는 행위다. 도선사는 도선의 유산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도선을 통해 이 공간을 새롭게 말하고자 하는 이름이다.


도선사는 도선의 사찰이 아니다. 그러나, 도선이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만든 사찰이다. 그것은 허구가 아니라, 집단적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진실의 또 다른 얼굴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지금도 여전히,

하늘을 가리키는 돌 위에 조용히 앉아 있다.



5. 돌 위의 세 가지 상징: 귀부·비신·이수

땅은 기억을,
돌은 해석을,
용은 침묵을 남긴다


도선사 경내에 들어서 가다 보면 오른쪽 가파른 계단이 보인다, 그리고 계단의 꼭대기 우러러봐야 하는 높은 곳에 눈에 띄게 장엄한 하나의 석조물이 서 있다. 수묵화처럼 엷은 이끼가 드리운 거대한 탑비, 그 아래는 거북이 받치고 있고, 위에는 용이 하늘을 향하고 있다.


이 돌은 세 겹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1. '거북이 엎드린 형상'이라는 뜻의 받침돌, 귀부(龜趺)

2. 비문이 새겨지는 직사각형의 석판, 비신(碑身)

3. 그리고 받침돌 위를 덮고 있는 용머리 조형물, 이수(螭首).


이 세 가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이것은 조용히 작동하는 사유의 구조,

말 없는 상징체계다.



6. 도선사 청담스님 탑비의 기호학적 해석: 정화불사의 성지에서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 서 있는 청담스님의 탑비는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다. 이것은 20세기 한국불교가 겪은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증언하는 살아있는 텍스트이며, 전통과 현대성이 만나는 문화적 교차점이다¹.


190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1971년 서울 조계사에서 입적한 청담스님(淸潭)의 삶은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한국전쟁, 그리고 근대화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와 정확히 겹쳐진다². 특히 도선사는 청담스님이 1961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주석했던 인연 깊은 도량으로, 이곳에 세워진 탑비는 스님의 마지막 10년간의 치열한 정화불사와 종단 재건의 의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정화불사(淨化佛事)

정화불사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까지 한국불교계에서 일어난 대규모 개혁 운동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며 불교계에는 결혼한 승려인 대처승이 늘어나 전통적인 비구승 중심의 질서가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불교계 내부에서는 청정한 승단을 회복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 발표를 계기로 정화불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전국적으로 비구승 중심의 사찰 운영과 승단 재건이 추진되면서, 대처승과 비구승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물리적 충돌과 법적 분쟁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계는 승단의 청정성과 전통성 회복, 그리고 위상 제고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결국 1962년 비구와 대처승이 통합된 종단이 출범하면서 정화불사는 일단락되었다. 이 운동은 한국불교의 근대화와 수행 전통 회복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기반이 바로 이 정화불사에서 비롯되었다.

1. 귀부(龜趺) - 영원성의 기호학

바다거북이 진 우주의 무게

탑비의 기단부에 자리 잡은 거북 형상의 귀부는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가장 오래된 기념비 양식 중 하나다. 하지만 청담스님의 귀부는 전통적인 용귀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용의 머리와 거북의 몸을 결합한 이 상상의 동물은 단순히 비석을 받치는 받침이 아니라, 시간의 무게를 감내하는 존재의 은유다.


귀부란 중국에서 시작되어 한국에 전래된 비석 양식으로, 거북 형상의 돌 받침대를 말한다. 거북은 장수를 상징하며, 용두거북(龍頭龜)의 형태로 제작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이나 고승의 탑비에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귀부 주변에 배치된 둥근 구슬 형태의 장식이다. 이러한 구슬 장식은 불교에서 보주(寶珠)를 상징하며, 청정함과 깨달음을 의미한다.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청담스님의 정신력을 형상화한 것이다.



2. 비신(碑身) - 이중 언어의 변증법

청담스님 탑비의 특징적인 면은 국한문 혼용으로 비문이 작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1970년대 초 한국 사회의 언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단순한 언어적 선택이 아니라 그 시대의 문화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국한문 혼용 방식은 전통적인 한문 교양과 근대적 한글 교육이 공존했던 과도기적 특징을 보여준다. 이는 청담스님이 추구했던 "전통과 현대의 조화"라는 철학적 지향과도 일치한다.


*비문학(碑文學)

비석에 새겨진 글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 금석학(金石學)의 한 분야다. 비문은 당대의 언어, 사상, 사회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1차 사료로 활용된다.


사진에서 보이는 한문 비문에는 청담스님의 생애와 업적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다. 비록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모든 글자를 선명하게 읽기는 어렵지만, 이 비문 자체가 1970년대 초 한국불교계의 정화불사와 종단 재건 과정을 담은 귀중한 사료다.



3. 이수(螭首) - 권위와 겸손의 역설

사형용들이 말하는 것

비신의 상단을 장식하는 이수는 전통적으로 왕실이나 최고위 관료의 무덤에만 사용되던 장식이었다. 하지만 청담스님의 탑비에서 이수는 세속적 권력이 아닌 정신적 권위를 상징한다.


지붕 형태로 조성된 이수에는 여러 마리의 사형용(蛇形龍)들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이들은 뱀처럼 긴 몸을 가진 용 또는 이무기로, 여의주를 두고 서로 얽혀 다투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운룡문의 특징인 이런 사형용들은 청담스님이 추구했던 "무소유의 소유"라는 역설적 가치관을 건축적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 이수(螭首)

비석 상단의 용머리 장식을 말한다. 이(螭)는 뿔이 없는 용을 의미하며, 주로 황제나 고위 관료의 신분을 나타내는 장식으로 사용되었다.



4. 귀수(龜首) - 거북의 지혜

사진을 확대하기 전까지 몰랐는데 계단에서 마주쳤던 고양이가 따라왔다.

한편 기단부 귀부의 거북 머리는 별도로 귀수(龜首)라 불리며, 이수의 용머리 장식과는 구별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이 거북 머리는 장수와 인내를 상징하며, 청담스님의 오랜 수행 정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4. 공간 배치의 해석학

도선사, 정화불사의 성지


청담스님의 탑비가 서울 삼각산 도선사에 위치한 것은 깊은 의미를 갖는다. 도선사는 청담스님이 1961년 주지로 취임한 이후 1971년 입적할 때까지 10년간 주석했던 도량으로, 스님의 마지막 정화불사와 종단 재건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 청담스님은 1968년 호국참회원을 건립하고, 성철스님과 함께 실달학원을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삼각산의 수려한 자연환경 속에 자리 잡은 탑비는 청담스님이 추구했던 "자연과 조화로운 수행"의 이상을 보여준다.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곳은 현실 참여와 은둔 수행의 균형을 의미하며, 청담스님의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을 공간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 위법망구(爲法忘軀)

“법(法)을 위(爲)하여 몸(軀)을 잊는다(忘)“는 뜻으로, 정의나 도리를 위해 자신의 몸이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희생한다는 의미다.



5. 천–지–인(天地人)의 기호 구조

이 탑비는 단순한 기념비가 아니다.

그 구조 자체가 천(天)–지(地)–인(人) 구조를 따른다:

귀부는 땅이다.

비신은 사람이다.

이수는 하늘이다.


이 삼중 구조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의 축약이며, 이 석조물이 어떻게 우주의 구조를 상징적 형태로 압축했는지를 보여준다.



6. 기호란 무엇인가?

기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도구다.

글자, 형상, 위치, 구조—이 모든 것이

어떤 ‘보이지 않는 뜻’을 가리킨다.


도선사 탑비는 ‘말하는 돌’이 아니라

‘말없이 가리키는 돌’이다.


도선사 탑비는

땅 위에 남은 ‘기억의 자리‘이고,
돌에 새겨진 ’해석의 흔적‘이며,
하늘을 향한 ’질문의 손가락‘이다.


그것은 완성된 메시지가 아니다.

질문이 구조화된 형태이며,

해석이 끝나지 않은 열린 기호다.


삼단 탑비의 역사적 기원과 발전 과정


중국 기원과 한국적 변용


이 삼단 구조는 중국 한대(漢代)의 비희(贔屭) 전통에서 유래했습니다. 비희는 용왕의 아홉 아들 중 하나로, 무거운 것을 짊어지기를 좋아하는 용-거북 혼합 신수입니다(Wikipedia +2). 205년 쓰촨 성 판민(樊敏) 묘비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예이며,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정형화되었습니다(WikipediaAlchetron).


한국에는 삼국시대 말기 당나라와의 문화 교류를 통해 도입되었으며, 661년 신라 무열왕릉비가 한국 최초의 완전한 귀부-비신-이수 구조를 보여줍니다(WikipediaAlchetron). 이 비석은 거북의 머리가 위로 향하고 앞발이 전진하는 자세를 취해 '진취적 기상'을 표현했으며, 거북 등에는 육각형 벌집무늬를, 이수에는 뿔 없는 용 세 마리가 서로 얽힌 모습을 조각했습니다(Newworldencyclopedia).



시대별 발전과 특징


통일신라(668-935): 당나라 영향이 강화되면서 삼단 구조가 표준화되었습니다. 왕실과 최고위 귀족의 기념비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불교적 요소와 토착 신앙이 융합된 독특한 양식을 발전시켰습니다.


고려시대(918-1392): 1026년 봉선홍경사 갈기비(ThereaderwikiWikipedia국보 제7호)처럼(Wikipedia +2) 세련된 조각 기법과 지역적 특색이 나타났습니다(Wikipedia +3). 거북 받침이 점차 용의 특징을 띠기 시작했으며(Museum), 불교 사찰의 고승 탑비 제작이 활발했습니다.


조선시대(1392-1910):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장식이 간소화되고 유교적 덕목 강조가 두드러졌습니다(Ucla) 왕릉의 비각(碑閣)과 통합되어 조선 왕릉 건축의 필수 요소가 되었으며, 신분에 따른 비석 형태가 법전에 명문화되었습니다.


의미와 상징성의 다층적 해석

유교적 해석과 불교적 의미


유교적 관점에서 이 구조는 도덕적 모범의 영구 보존과 사회 위계질서의 시각화를 의미했습니다. 비문은 충(忠), 효(孝), 의리(義理) 등 유교적 덕목을 기록하여 후세의 교육 자료로 활용되었고, 정교한 구조는 양반 계급의 특권을 상징했습니다(Wikipedia).


불교적 맥락에서는 삼계(三界) 우주관을 표현했습니다. 귀부는 지계(地界), 비신은 인간계, 이수는 천계를 상징하여 우주적 질서 속에서 고승의 깨달음과 공덕을 기념했습니다. 특히 승탑비는 단순한 기념물을 넘어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탑돌이와 같은 의례 행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Museum).



풍수지리와 배치의 원칙


비석의 위치 선정에는 풍수지리(風水地理) 원칙이 엄격히 적용되었습니다(Worldhistory +3). 북쪽의 산이 보호하고 남쪽이 트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을 선호했으며, 양기(陽氣)를 최대화하기 위해 남향 배치를 원칙으로 했습니다. 백두대간과 연결된 산맥의 정기를 받고, 물의 흐름과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선택하여 후손의 번영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습니다.


참고자료


¹ 「청담(靑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² 청담스님 전기편찬위원회, 『청담스님 일대기』; 「청담스님 입적 50주기」, 『불교신문』 (2021).

청담스님의 위법망구 정신」, BBS불교방송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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