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가 품은 시간의 문장
서울 북쪽 끝자락,
지하철 4호선 수유역에서 내려 북한산 방향으로 버스를 갈아타면, 도시의 소음이 점점 뒤로 물러난다.
북한산 자락으로 오르는 오솔길은 생각보다 조용하고, 생각보다 가파르다.
여름이면 땀이 나고, 겨울이면 숨이 찬다.
그 길 끝 도선사 경내로 들어서면 약간 굽은 비탈을 오르내린다. 그리고 비탈을 내려가 사찰이 보이면 오른쪽으로 가파른 계단길이 있다. 그 계단의 끝을 우러러보면 세상을 굽어 살피고 있는 석상과 비석이 보인다.
올라갈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다
가파른 계단 길을 오른다.
계단의 끝에 이르면 북한산의 체액이 흐르고 있고,
나는 그 액체로 타는 목을 축인다.
그 한 모금의 약수는 모든 수고를 잠시 멈추게 한다.
약수를 마시고 한숨을 돌린 뒤 내려다보면
거대한 비석 같은 돌이 있다.
이 돌은 말이 없다.
그러나 이 돌은, 침묵 속에서 질문을 던진다.
높이 4미터 남짓,
거북이 형상의 받침돌 위에 네모난 비석이 서 있고,
거북이 얼굴 대신 용의 머리를 닮은 조형물이 얹혀 있다. 누구도 설명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압도된다.
말보다 먼저 도착한 권위
이름보다 앞선 형상
도선사 경내에 세워진 이 비석은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다.
그것은 말 없는 기호이자,
눈으로 읽는 문장이다.
당신은 그 문장을 읽을 수 있는가?
이 비석(사리탑)의 주인공은 20세기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지도자였던 청담순호대종사(1902-1971)다.
그는 1961년 도선사 주지로 취임하여 사찰을 중흥시켰으며, 1971년 11월 15일 입적한 후
이곳에 사리탑이 건립되었다.
흥미롭게도 사찰 이름은 9세기 도선국사에서 유래했지만, 이 탑비는 20세기 청담대종사의 것이라는 점에서 천년의 시간차가 존재한다.
이는 전설과 현실, 상징과 실체가 복합적으로 얽힌
한국 불교문화의 독특한 사례를 보여준다.
현재 이 사리탑은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며,
용머리 장식(이수)은 공사 기간 동안
임시 보관되어 있다.
이 탑비를 처음에는 도선국사의 탑비로 착각했다. 그만큼 도선사의 ‘도선’이라는 기호가 큰 정체성을 갖고 있고, 선입견을 먼저 형성한다. 그러므로 도선국사에 관한 이야기가 도선사의 상징 기호로서 가장 큰 의미를 가진다.
도선국사는 신라 말, 고려 초의 혼란기를 살아간 승려이자 풍수의 대가, 왕건의 조언자였고, 때로는 '나라의 운명을 읽은 자'로 기억되는 인물이다.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고,
더 많은 전설이 덧붙여졌다.
그러나 도선국사에 관한 가장 깊은 진실은,
그의 이름을 딴 이 사찰에 조용히 놓인 용머리가 말해준다. 이 돌은 묻는다.
왜 여기에, 왜 지금,
왜 하늘을 향해 이 침묵을 세웠는가?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풍수’라는
고대의 언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땅의 결을 읽고,
물의 흐름을 짚으며,
사람과 하늘의 조화를 설계한 세계관.
이곳 도선사에 깃든 돌 하나는,
그 모든 사유의 흔적을 압축해 품고 있다.
혹자는 이 용머리를 기호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그 침묵을 권위의 상징이라 하고,
또 다른 이는 하늘을 향한 질문이라 말한다.
사실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앞에서 멈추고
무언가를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의미는 거기서 생겨난다.
이 글은 그 해석의 첫걸음이다.
도선이라는 한 인물의 생애, 풍수라는 사상의 지형도,
그리고 도선사라는 공간이 품고 있는 상징을 함께 따라가 보려 한다. 기호학적 설명은 아주 살짝 곁들일 것이다.
만약 그 침묵 속에 담긴 더 깊은 철학이 궁금하다면,
아래 책을 펼쳐도 좋다.
그러나 지금은,
천천히 걸어가며
돌 하나의 질문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다.
우리는 보통 인물을 기억할 때 그의 업적이나 외모, 혹은 후대의 평가로 기억한다. 그러나 어떤 인물은,
그 이름 하나로도 강한 인상을 남긴다.
도선(道詵)이 바로 그렇다.
‘도(道)’는 길이요, 진리이며, 인간과 자연과 우주의 원리다.
‘선(詵)’은 말을 뜻하는 언(言) 변에 먼저 선(先)으로 이루어진 형성자로, 《설문해자》에서는 詵은 “致言也(말을 전하다, 드러내어 말하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즉, 도선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길을 설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도(道)의 흐름을 언어로 전하는 자,
혹은 도에 관한 말이 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후대의 기억은 이 이름에,
하나의 시대와 세계관을 겹겹이 덧씌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도선국사는
신라 흥덕왕 2년(827년)에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다만 정확한 출생지는 기록마다 다르게 전해진다.
『고려사』는 이를 명확히 밝히지 않지만,
조선 후기 지리지나 비기류 문헌에서는 전남 강진 또는 영암 지역을 중심으로 전한다.
일부 기록은 강진의 ‘무위사’ 인근, 또는 영암 월출산 자락에서 그가 출가했다고 서술한다.
현재 학계에서는 도선의 활동 중심이 전남 강진~영암 일대였다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도선은 젊은 나이에 화엄사 계열의 사찰에서 출가했다. 화엄사, 무위사, 백양사 등은 도선의 수행 및 활동 근거지로 여겨진다. 이 시기는 신라 말기의 혼란기였으며, 도선은 불교 경전만이 아니라 중국에서 유입된 지리 이론과 음양오행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도선의 이름과 가장 강하게 연결된 것은 풍수지리다. 다만 여기서 유의할 점은, 오늘날 상업적으로 소비되는 풍수 개념과는 전혀 다른, 공간에 내재된 천지의 질서를 읽어내고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배치를 모색하는 철학적 체계였다는 점이다.
* 풍수지리란?
풍수지리(風水地理)는 ‘바람과 물의 지리학’이라는 이름이지만, 단지 지형에 대한 관찰이 아니다. 기(氣)의 흐름, 산의 맥(脈), 물줄기의 방향, 음양의 조화 등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자리를 찾는 사유체계였다.
도선은 이 체계를 한국 실정에 맞게 체계화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가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도선비기(道詵秘記)』는 향후 수백 년간 수도 입지, 사찰 건립, 무덤 터 선정 등에 영향을 미쳤다.
『삼국유사』의 일부 설화는 도선이 고려의 시조인 왕건에게 수도 입지를 권했다는 전설을 전한다.
“개경은 천하의 명당이며 오백 년 왕업이 유지될 터이니 도읍하라.”는 내용이다. 실제 고려는 개성(개경)을 수도로 삼았고,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해석 혹은 신화화된 전승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 고려 초기 사료에는 왕건과 도선의 직접적 만남을 증명하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도선이 살아있던 시기(827~898년)와 왕건의 활동 시기(877 ~ 943년, 태조 즉위 918년)는 겹치므로 동시대인은 맞다.
이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합리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도선은 정치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승려는 아니었지만,
그의 풍수 이론은 후대의 정치 정당성을 정초 하는 이념으로 활용되었으며,
왕건 및 후대 고려 왕실이 도선을 신성화된 조언자 또는 선구자로 재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도선에게 ‘국사(國師)’라는 칭호가 언제 공식적으로 주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는 그를 “국사”로 일컫긴 하지만, 생전에 그 칭호를 받았는지,
혹은 사후 추증인지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현재 학계 다수는 “국사” 칭호는 사후에 추증된 명예 칭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즉, 고려 왕조가 안정화되고 나서, 자신들의 정통성과 공간 질서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인물로서 도선을 신성화하며 부여한 칭호라는 해석이다.
도선은 898년, 신라 진성여왕 12년에 입적하였다.
그의 입적 후 수백 년이 흐르며, 그는 단지 풍수학자가 아니라 국가적 공간을 설계한 ‘성인’,
미래를 예견한 ‘지자(智者)’,
신라와 고려를 가르는 시간의 경계자로 재해석된다.
이러한 현상은 흔히 영웅 신화화 과정으로 설명된다.
그의 이름은 전국에 걸쳐 남았고,
그가 잡았다고 전해지는 명당은 수십 곳에 이르며,
‘도선국사 터’, ‘도선암’, ‘도선비기’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공간에 권위를 부여하는 장치가 되었다.
도선은 더 이상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말을 들었던 사람’, 혹은
‘하늘을 가리킨 손가락’이 된 것이다.
복잡한 답이 필요하다.
지금 서울 강북구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도선사(道詵寺)'는 도선국사 생전의 창건이 아니다.
사적기에 따르면 도선사는 862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지만, 이는 전설이다. 실제 기록상 현재 도선사의 중건/중수 역사는 다음과 같다:
- 1863년(철종 14) 김좌근의 시주로 중수, 칠성각 신축
- 1887년(고종 24) 임준이 오층탑 건립, 석가모니 진신사리 봉안
- 1903년 혜명이 고종의 명을 받아 대웅전 중건
그리고 현재 우리가 주목하는 탑비(사리탑)는 도선국사와는 전혀 다른 인물—청담순호대종사(1902-1971)—를 위한 것이다. 그는 1961년 도선사 주지로 취임하여 사찰을 중흥시켰고, 1971년 입적 후 이곳에 사리탑이 건립되었다.
그렇다면 왜 '도선'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 하나는 풍수지리적 상징성이다. 도봉산과 북한산은 한양 도성의 주산(主山)으로 여겨졌고, 이 명당의 기운을 설명하기 위한 상징으로 도선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 다른 하나는 불교계가 도선국사를 상징 자산으로 복권하려는 의도일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억불정책이 완화되며, 불교계는 고려의 정통성과 연결되는 인물들을 상징적으로 부활시키려 했다.
결과적으로 도선사는 이름과 실제 탑비 주인공 사이에 천년의 시간차가 존재하는 독특한 공간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풍수와 불교, 그리고 하늘의 질서를 잇는 기호로 작동하는 장소임은 분명하다.
도선(道詵)은 단순한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대를 읽는 ‘말의 울림’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사람과 공간, 하늘과 권력을 이어주는 기호로 남아 있다.
우리는 이 장에서 한 사람의 실존과 신화를 구분해보았다. 이제 다음 장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사찰에 세워진 또 다른 인물의 사리탑—현재 해체 복원 공사 중인 청담순호대종사의 탑비—앞으로 가보려 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침묵하는 용의 머리가 품은 시간의 중첩과 의미의 변주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도선사 경내 가장 높은 곳에는 청담순호대종사(靑潭淳浩, 1902-1971)의 사리탑(舍利塔)이 자리하고 있다.
이 구조물은 20세기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지도자였던 청담대종사가 1971년 11월 15일 입적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전형적인 형식의 승탑이며,
형식과 배치, 상징 요소 등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탑은 중앙에 높게 세워진 석조 다층형 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층부는 옥개석(지붕돌)이 여러 단으로 겹쳐진 전통 불탑 형식이며, 중간 몸체는 연화좌나 보상화문 등 불교적 상징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하단 기단부는 거북과 사자 형상의 조각상들이 배치되어 있어,
탑을 떠받드는 형식으로서 장수, 보호, 위엄 등의
상징을 구현한다.
탑을 둘러싸고 있는 벽면은 만불상(萬佛像) 형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동일한 형태의 작은 불상이 벽 전체를 빼곡히 채우고 있으며, 이는 청담대종사의 공덕이 개인의 성취를 넘어 전체 중생을 위한 회향의 공간임을 상징한다. 중앙에는 부처의 좌상 부조가 돌에 새겨져 중심성을 강조한다.
이 구조물은 도선사의 최고지점, 즉 사찰 내 가장 높은 지형에 위치한다. 이는 청담대종사가 1961년부터 도선사 주지로 재임하며 사찰을 중흥시킨 공덕을 기리는 동시에, 불교의 전통적 풍수 인식에서 말하는 '기운의 혈처(穴處)'에 해당한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극락왕생과 진여의 경지를 기원하는 위치로 해석된다. 탑 주위로는 물이 흘러 정화의 상징으로서의 물(수)의 요소 또한 결합되었음을 시사한다(약수도 마실 수 있다).
2025년 현재 이 사리탑은 오염, 부식, 지반 침하 등으로 인해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청담대종사 열반 53주기를 맞아 진행되는 이 불사를 통해 탑의 보존과 함께 그의 정신적 유산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사리탑은 단순한 장식적 조형물이 아니라, 현대 한국불교사의 중요한 인물인 청담순호대종사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불교의 세계관과 우주론이 집약된 상징체계이다. 탑은 대종사의 공덕을 기리고, 만불상은 그 공덕이 중생에게 회향됨을 나타내며, 산꼭대기라는 입지는 그 사리의 의미가 하늘로 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이 공간은 20세기 한국불교 정화운동의 기념물이자 동시에 해석의 장소이며,
침묵하는 종교적 기호의 집합체로 기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