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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아카데미하우스 진입로에서 발견한 기억의 장소들

우연히 마주한 역사의 무게

by 법의 풍경

그동안 너무 바빠서, 산을 찾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 마침 밀린 업무들 대부분을 정리하고 나니 잠깐의 틈이 생겼지만, 아직 마감하지 못한 일들도 있어 겨우 한 시간 정도만 여유가 났습니다.


산책을 할까, 사이클을 탈까,

아니면 잠시라도 산에 올라볼까 잠깐 망설이다가

결국 북한산으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진입로가 여러 곳이지만, 오늘은 아카데미하우스 쪽을 택했습니다. 집에서 그 길목까지 왕복 30분. 결국 실제 산속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분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그 짧은 30분 동안, 저는 수십 년의 시공간을 넘어 ‘역사의 깊은 곳’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저와 함께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시죠.

응큼한 가을 햇살이 산등성이를 더듬기 시작하는 시각, 나는 북한산 아카데미하우스 방향의 진입로를 올라가고 있었다. 단풍이 물든 나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발걸음과 어우러졌다.


내게 허용된 시간은 30분, 가벼운 산책이었다.

특별한 목적지도, 거창한 계획도 없었다.

그런데 우연히 발걸음을 멈춘 그곳에서,

나는 한국 현대사의 아픈 기억과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커다란 소나무 아래 놓인 검은색 표지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1894년에 태어나 1956년 급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이자 초대 국회의장. 그리고 이승만 독재에 맞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유세 중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인물. 역사 교과서에서 들어본 이름이었지만,

이렇게 그의 묘소를 마주할 줄은 몰랐다.


표지판에는 그의 생애가 간략히 적혀 있었다. 3·1 운동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26년간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후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다는 내용.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는 기록도 보였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주의자. 일제와 싸우다가, 해방 후에는 독재와 싸우다 쓰러진 인물. 가을 오후의 고요한 묘역에서, 그의 삶이 조용히 기억되고 있었다.



1. 이념을 넘어선 인정, 그러나 남은 질문들

신익희의 묘소에서 조금 더 걸어가자, 또 다른 표지판이 나타났다. "경찰관 및 공무원에 지령된 3·15 부정선거 감행 방법 - 민주당 발표"라는 제목 아래, 빼곡하게 적힌 텍스트가 보였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 방법을 폭로한 1960년 3월 3일 자 민주당의 성명서였다.


흥미롭게도, 이 성명서를 발표한 민주당은 바로 신익희가 창당을 주도한 정당이었다. 신익희는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유세 중 급서 했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960년, 그가 만든 정당이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폭로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다.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대한민국 제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대규모 부정선거. 관권 동원,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조작 등 조직적 부정이 자행되었고, 이에 항거한 시민들의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국민의 저항이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첫 사례로 기록된다.

표지판 앞에 서서 그 문구들을 읽으며,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65년 전, 누군가는 이 방법들을 실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에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기록이 가을 산책로 한편에 조용히 전시되어 있다.

2. 망각과 기억 사이: 4·19 혁명 기념비

더 걸어가자 "4·19 혁명 기념비"가 나타났다. 커다란 검은 대리석에 새겨진 문구는 간결했다:

"부정선거 감행하면 백만학도 궐기한다."

그 아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삐라는 데모가 되고 소리가 되고 태풍같은 바람이 되어 스스로 일어나 뛰고 달려 표 도둑 잡아내고 독재정부 몰아내고 마침내 우리는 공명정대하게 이기고 승리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시작한 항쟁, 민주당이 3월 3일 공개한 부정선거 감행방법, 이후 3월 5일 서울 최대 거리 데모와, 3월 15일 부정선거, 그리고 4월 19일 전국적 봉기까지 이어진 살아있는 역사의 격문이었다.


신익희가 꿈꾸던 민주주의가, 그의 죽음 4년 후,

학생들과 시민들의 피로써 이루어지는 과정이었다.



3. 저항의 흔적: 전단지를 인쇄한 사람들

조금 더 올라가니 계단 위로 또 다른 표지판이 보였다. "4월 혁명 예고[지워짐] 격문. 삐라 여기서 인쇄"라는 제목이었다. 부제로 한자가 크게 새겨져 있었다:


"不正選擧 自行하면 百萬學徒 蹶起한다
(부정선거 자행하면 백만학도 궐기한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에 맞서 싸우던 이들이 1960년 2월 27일부터 28일 양일간 이곳에서 극비리에 모여 전단지를 인쇄했다는 내용이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표지판 하단에 "삐라 격문 인쇄자" 명단이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삐라'는 전단지를 뜻하는 일제강점기 일본어 '비라(ビラ)'에서 온 말이다.

명단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卜鎭豊(복진풍, 건국대): 인쇄 및 배포 책임자로 구속 및 제적

李愚大(이우대, 동국대), 金容植(김용식, 유도대), 申台鉉(신태현, 성균관대), 趙雄(조웅, 건국대),

申基喆(신기철), 申良喆(신양철)(제실관리인),

趙成熙(조성희, 필경사).


아마도 그들은 독재 정권에 맞서 인쇄물을 만들어 뿌렸다는 이유로 구속되고 고문당했을 것이다.

잊힌 이름이기에 한 번쯤 그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


2018년 11월에 세워진 이 표지판은, 그들의 행위가 단순한 '불법'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저항'이었음을 뒤늦게 인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표지판을 읽을까? 가을 산책을 즐기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저 지나쳐갈 것이다.

나처럼 우연히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한.



4. 신익희 묘소:

독립운동에서 민주주의까지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은 신익희의 묘소였다. 표지판에는 "국가등록유산(State-registered Heritage)"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의 생애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신익희(1894~1956)는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교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1918년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그는 독립을 위한 민중 봉기를 기획했다. 중국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찾아가 만나고 돌아와 1919년 3·1 독립만세 시위를 이끌었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로 간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처음부터 참여했다. 임시의정원의 기초를 세우고, 초대 내무차장, 법무차장, 외무차장 등을 거쳐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또한 중국 국민군에 들어가 제2군 육군 중장이 되어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1945년, 26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신익희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선도하는 한편, 국민대학교를 세우고 초대 학장이 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에서 초대 국회 부의장에 선출되어 헌법 제정을 주도했으며, 이후 제3대 국회의장까지 연이어 지냈다.

1955년 야당인 민주당을 만들고, 1956년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유세에 40만 인파가 모이기도 했다. 그러나 5월 5일, 유세를 위해 진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에는 상석, 향로석,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 풍부한 석물들이 갖춰져 있었고, 원형 봉분 아래쪽에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었다. 그의 묘소는 국민장으로 조성되었고,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신익희의 삶이 보여주는 역사의 연속성

신익희

신익희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두 가지 큰 흐름—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하나로 연결한다. 그는 일제 식민지배에 맞서 싸웠고, 해방 후에는 독재에 맞서 싸웠다. 그의 삶은 "자유"를 향한 투쟁이 시대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뿐,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연속선상에 있음을 보여준다.


현대로 치자면 회사 다닐 시절에는 부당한 경영진에 맞서 싸우고, 부당해고로 회사를 나와서는 부당한 국가 관행에 맞서 싸우는 것과 비슷하다. 상황은 달라졌지만, '정의'를 향한 사람의 일관된 태도는 변하지 않는 걸까?


표지판을 읽으며, 나는 이 산책로가 왜 신익희의 묘소를 중심으로 조성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삶 자체가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하나로 잇는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창당한 민주당이 4년 후 3·15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4·19 혁명을 통해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5. 우연한 발견이 남긴 것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계속 생각했다.

신익희는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유세 중 급서 했다. 만약 그가 심장마비에 걸리지 않고, 당선되었다면 한국 현대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4·19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

신익희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고,

그의 동지들과 학생들이 그 꿈을 이어받았다.

그리고 4년 후,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이 표지판들이 2018년 11월에 세워졌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2018년은 촛불혁명 직후였다.

시민들이 다시 한번 민주주의를 지켜낸 직후, 우리는 과거의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 사회가 과거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독재에 맞선 이름 없는 전단지 인쇄자들을 기억하려는 노력. 이것은 단순한 역사 복원이 아니라,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라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동시에, 이 표지판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기억을 전승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산책로를 지나가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표지판 앞에서 걸음을 멈출까? 설령 읽는다 해도, 빼곡한 텍스트와 한자로만 표시된 생경한 이름들을 읽을 수 있는 젊은 세대는 몇이나 될까?


어쩌면 기억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전승되지도, 완전히 망각되지도 않는. 우연히 산책길을 걷던 누군가가 발걸음을 멈추고, 표지판을 읽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고, 집에 돌아가 검색해 보고, 글을 쓰는. 그런 단편적이고 우연한 방식으로 이어지는 것.


나도 심장마비에서 살아남았던지라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6. 기억의 정치학:

누가 기억되고, 누가 잊히는가

신익희 묘소 입구

이 산책로에서 마주한 표지판들이 제기하는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신익희는 독립운동가이자 민주주의자로 기억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26년간 활동했고, 해방 후에는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민주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의 삶은 교과서에 실리고, 묘소는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전단지를 인쇄했던 이름 모를 사람들은 어떤가? 그들은 오랫동안 망각되어 있다가 2018년에야 표지판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을까?

그리고 여전히 기억되지 못한 이들은 얼마나 많을까?

4·19 혁명을 주도한 학생들은 영웅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불법 집회를 조직했던 활동가들,

위험을 무릅쓰고 전단지를 배포했던 시민들의 이름은 대부분 역사에 남지 않았다. 표지판에 적힌 "삐라 격문 인쇄자" 명단조차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기억의 정치학(Politics of Memory)>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
사회가 과거를 기억하고 재현하는 방식은 중립적이지 않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 것인지, 어떻게 해석하고 전승할 것인지는 정치적 권력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독재정권은 자신에게 불리한 역사를 지우려 하고, 민주화 이후에는 과거에 억압받았던 기억들이 복원되기 시작한다. 기념비, 박물관, 교과서, 기념일 제정 등은 모두 '기억의 정치학'이 작동하는 장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박스(Maurice Halbwachs)는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기억이란 개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주 1]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정체성과 권력관계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 산책로의 표지판들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이 장소들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라고 판단했고, 예산을 배정했고, 텍스트를 작성했고, 표지판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는 강조되고, 어떤 이야기는 생략되었을 것이다.



7. 장소의 기억: 왜 이곳인가

신익희 묘소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표지판들이 한 장소에 모여 있다는 것이다. 신익희의 묘소, 3·15 부정선거 폭로 성명서, 4·19 혁명 전단지 인쇄소. 시대적으로는 연결되어 있지만 구체적 사건은 다른 이 역사적 장소들이 왜 한 곳에 모여 있을까?


답은 간단하다. 이곳이 원래 독립운동가들과 민주화 운동 관련 인사들의 묘역으로 조성된 곳이기 때문이다. 신익희처럼 독립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모두 겪은 인물의 묘소를 중심으로, 그와 연결된 역사적 사건들이 함께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억의 공간화'는 역설적 효과를 낳는다. 한편으로는 흩어져 있던 기억들을 한 곳에 모아 집중적으로 전시함으로써 교육적 효과를 높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를 '박물관화'하여 일상과 분리시킨다.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와 잠깐 역사를 '소비'하고 떠난다. 일상의 삶과 역사적 기억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피에르 노라(Pierre Nora)

프랑스 역사학자 피에르 노라(Pierre Nora)는 "기억의 장소(lieux de mémoire)"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현대 사회에서 살아있는 기억(memory)이 죽은 역사(history)로 변환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주 2]


공동체가 자연스럽게 공유하던 기억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인위적으로 기념비, 박물관, 기념일 등을 만들어 기억을 보존하려 한다. 하지만 이렇게 제도화된 기억은 이미 '살아있는 기억'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산책로도 그런 '기억의 장소'다. 과거에는 신익희의 후손들이 직접 묘를 돌보고, 매년 제사를 지내며 이야기를 전승했을 것이다. 민주당 동지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고, 그의 뜻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살아있는 기억의 공동체는 사라지고, 국가가 관리하는 표지판만 남았다.



8. 산책자의 윤리: 우연한 발견 너머

파울 클레: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이 모든 성찰은 한 가지 질문으로 귀결된다. 우연히 이 표지판들을 마주한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사진 몇 장 찍고, SNS에 올리고, 잊어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조금 더 진지하게,

집에 돌아가 검색해 보고, 책을 읽고,

이 글처럼 생각을 정리해 볼 수도 있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역사철학 9번째 테제”에서 은유를 통해, 과거를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성찰했다. [주 3] 그는 파울 클레의 그림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를 보며 이렇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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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클레(좌), 발터 벤야민(우)
그 그림에는 마치 무언가로부터 막 떠나려 하지만, 동시에 그 자리에 얼어붙은 것처럼 보이는 한 천사가 그려져 있다. 그의 눈은 크게 뜨여 있고, 입은 벌어진 채이며, 날개는 펼쳐져 있다.

역사의 천사는 바로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그는 얼굴을 과거를 향해 돌리고 있다. 우리가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의 연쇄라고 부르는 것을, 그는 끊임없이 잔해 위에 잔해를 쌓아 올리며 그의 발치로 내던지는 하나의 유일한 대재앙으로 본다.

천사는 머물러서 죽은 자들을 깨우고 부서진 것을 다시 이어 붙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낙원에서 불어오는 폭풍이 그의 날개에 걸려들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천사는 더 이상 그 날개를 접을 수 없다.

그 폭풍은 그를 저항할 수 없이 미래로 몰아간다. 그는 그 앞에서 등을 돌린 채, 그 앞에 쌓여 올라 하늘에 닿는 잔해 더미를 바라본다. 우리가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폭풍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산책길에서 마주한 역사의 흔적들을 바라보지만, 그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신익희는 이미 1956년에 세상을 떠났고, 4·19 혁명의 희생자들은 이미 죽었고, 독재정권은 이미 무너졌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을 현재와 연결 짓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의 희생을 인정하고, 그들의 투쟁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성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신익희가 1956년 유세 열차에서 급서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절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동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4년 후, 그들은 3·15 부정선거를 폭로했고, 학생들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섰고, 결국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신익희 개인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그가 시작한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은 계속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과거의 투쟁이 현재의 우리를 만들었고,

현재의 우리가 미래를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9. 결론: 걷는다는 것, 기억한다는 것

산책로 한편 정체를 알 수 없는 곳에 있는 석상

산책은 본래 목적 없는 행위다. 특정한 목표지점을 향해 서두르지 않고, 그저 걷는 것 자체를 즐긴다. 하지만 바로 그 '목적 없음' 때문에, 산책은 우연한 발견의 기회가 된다. 서두르지 않고 걷기 때문에, 표지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출 수 있다. 목표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역사와 마주할 수 있다.


미국 작가 레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그녀의 책 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에서 걷기가 단순히 신체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이며, 사유의 과정이라고 썼다. [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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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하며 세계를 이해한다.


오늘 가을 오전의 산책도 그랬다. 나는 그저 걷고 있었을 뿐인데, 역사가 나를 불러 세웠다.

표지판들은 조용히 거기 서 있었을 뿐인데,

나는 멈춰 서서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우연한 만남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기억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기억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죽은 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멈춰 서고, 생각하고, 다시 걷기 시작하는 그 과정에서 살아 숨 쉰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언젠가 산책길에서 우연히 역사의 흔적을 마주칠지 모른다. 그때 부디 발걸음을 멈추고, 표지판을 읽고, 잠깐이라도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것만으로도, 기억은 이어진다.




주석

[1] Maurice Halbwachs, On Collective Memory, trans. Lewis A. Coser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2). 알박스는 뒤르켐의 제자로, 기억이 개인의 심리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공유되는 집단적 과정임을 처음으로 체계화했다.


[2] Pierre Nora, "Between Memory and History: Les Lieux de Mémoire, " Representations 26 (Spring 1989): 7-24. 노라는 프랑스혁명 이후 프랑스 국민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기억의 장소' 개념으로 분석했다.


[3] Walter Benjamin, "Theses on the Philosophy of History," in Illuminations, trans. Harry Zohn (New York: Schocken Books, 1968), 253-264. 벤야민의 이 에세이는 1940년 그가 나치를 피해 도피하던 중 작성되었으며, 그는 곧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4] Rebecca Solnit, Wanderlust: A History of Walking (New York: Penguin Books, 2000). 솔닛은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산책학파부터 현대 도시 산책자들까지, 걷기의 문화사를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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