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실의 검사 날짜는 6월 10일이었다. 심근경색 이후 약 3개월. 트레드밀 위의 내 몸은 이미 다른 몸이 되어 있었다.
처음 백병원 심장재활의학과에 처음 왔을 때, 나는 걷는 것도 조심스러워했다. 하지만 4월이 되자 무언가 변하기 시작했다.
그때 재활 전문의가 나에게 제안했다.
혹시 임상 연구에 참여할 의향이 있으신가요?
심근경색 회복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터벌 트레이닝의 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이었다. 기존의 일반적인 심장 재활 운동과 고강도 인터벌 트레이닝의 효과를 비교 분석하여 논문을 작성하려는 프로젝트였다.
“제 경우는 어떤 그룹에 속할까요?”
“당신은 나이가 비교적 젊으신 데다, 지난 한 달 동안의 회복 지표가 정말 빠르고 우수해요. 인터벌 트레이닝 그룹의 대상자로 가장 적합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일반인으로서 의료 실험의 대상자가 된다는 것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결정은 나의 회복 과정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과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여하겠습니다.
그렇게 4월부터 6월까지 2개월간 나는 다른 재활 환자들과는 다른 운동 프로토콜에 따랐다. 고강도 인터벌 트레이닝은 기존의 안정적인 운동과는 완전히 달랐다. 단시간에 최대 강도의 85–90% 정도로 운동한 후, 회복 기간을 거치고, 다시 고강도로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처음 몇 주간은 도전적이었다. 가슴에 대한 두려움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고강도 운동을 한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의료진과 함께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표 좋네요. 조금 강도를 높여보시죠.”
재활 치료사의 격려 속에서 내 몸은 점점 강해졌다. 퇴원 이후 처음 3개월은 매일 병원에 가서 운동을 했다. 매일의 반복이 신체의 기억이 되었고, 기억이 회복의 동력이 되었다.
6월의 최종 검사에서 그 차이는 명확해졌다.
검사 결과를 보면서 의사는 내게 수치들을 설명해 주었다. VO2 Max는 3054 ml/min, 이를 체중으로 나눈 VO2/Kg는 47.1 ml/min/Kg였다. 40대의 남성으로서 이것은 단순히 ‘정상’ 범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의료계에서는 보통 35 ml/min/Kg 이상을 ’우수’로 평가한다. 나의 수치는 그것을 훨씬 초과했다.
재활 전문의가 보여준 그래프에는 내 지표가 명확하게 상향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내 재활을 매일 체크해 주신 치료사님은 수치를 보더니 감탄사를 발했다.
"VO2 Max가 정말 놀라워요.
저보다 낫네요. 런닝맨의 김종국보다도 나으신데요?"
웃음이 나왔다. 심근경색으로 죽음의 문턱에 섰던 내 몸이, 이제는 대중적으로 인정받는 피지컬을 가진 연예인보다 우수한 신체 조건을 갖추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나는 의료 과학의 일부가 되었다. 나의 6개월 회복 과정이 단순한 개인의 승리를 넘어서, 인터벌 트레이닝의 효과를 입증하는 임상 근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 3개월 동안 매일 다녔던 재활 센터를 이후부터는 격일로 다니기 시작했다. 신체가 회복되면서 매일의 강도 높은 운동이 필요 없게 된 것이었다. 6개월 이후에는 3개월에 한 번, 그리고 1년 후에는 6개월에 한 번, 최종적으로는 1년에 한 번의 정기 검진으로 간격이 늘어났다.
이것은 단순한 운동 빈도의 감소가 아니라, 내가 더 이상 환자가 아니라는 것의 증명이었다.
병원을 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내가 겪은 것이 단순히 운이 좋은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는 다른 환자들을 돕기 위한 과학적 데이터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 삶을 다시 얻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기여인 것 같았다.
9월이 끝날 무렵, 나는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확신했다.
10월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코로나로 업계 전반이 슬로다운되면서 회사 자체도 일이 예전보다 많지 않았다.
그렇게 생긴 남은 시간들이 흥미로웠다.
나는 책을 많이 읽기 시작했다. 역사책, 철학책, 인문학 책들. 인문학 강의도 듣고, 언어 공부도 시작했다. 이집트어, 산스크리트어, 러시아어, 히브리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심근경색 이후 내가 필요하다고 느낀 것은 더 이상 육체의 강화가 아니라 정신의 깊이였다.
마치 3월에 죽음의 경계를 경험했기에, 그 너머에 있는 것들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처럼.
첼로 학원도 다시 나갔다. 처음 몇 주간의 어색함을 지나, 이제는 음악 공부 자체가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활동 속에서 한 가지 이상한 현상을 깨달았다. 매일 운동을 하고, 매일 책을 읽고, 매일 악기를 연습하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멈추지 않는 생각들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마치 엔진이 계속 가동 중인 것처럼. 그것이 나중에 불면증으로 나타나게 될 증상의 초기 신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단순히 정신이 활발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첼로 학원을 나가다 한 사람과 마주쳤다.
재활 치료사였다. 그는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나가고 있었다.
오! 여기 학원 다니세요?
둘 다 매우 놀랐다. 그 순간 시간이 섞이는 경험을 했다. 지난 6개월간 내 몸을 지켜봤던 의료진이, 지금은 우연히 같은 음악 학원 앞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6개월 전만 해도 나는 저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내 심장의 상태, 내 운동의 강도, 내 회복의 진행 정도까지 모든 것이 그의 판단 속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의료 관계가 아니었다. 같은 음악 학원의 학생이었다.
(재활치료사님은 학원 공연에서 사진도 많이 찍어 주셨다.)
나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아니, 더 정확하게는 새로운 차원의 삶이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원했던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6개월 후 내가 원하게 된 것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였다.
그리고 그 후 나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것을 실현하고 있었다. 운동을 통해, 음악을 통해, 공부를 통해.
2년이 지난 2022년, 나는 예상치 못한 일과 마주쳤다.
코로나 감염이었다. 신문 헤드라인에서만 읽던 일이 직접 나의 일이 되었다.
증상 자체는 비슷했다. 하지만 심근경색 이력을 가진 사람에게 코로나는 다른 의미였다.
감염에서 회복된 후, 예상치 못한 후유증들이 나타났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불면증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불면증과는 조금 달랐다. 머릿속에서 좋은 생각들이 끊어지지 않는 증상이었다. 마치 누군가 내 뇌에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이전에 운동을 하면서 경험했던 그 활발한 정신 상태가 이제는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변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나는 일어나서 그 생각들을 적기 시작했다. 새벽 2시, 3시에 일어나 노트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기록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난 후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려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시간이 늘어났다. 새벽의 고요한 시간에 성경, 도덕경을 펼쳤다. 마치 내 뇌의 엔진을 끄기 위해, 여러 개의 다른 엔진을 켜려는 것처럼.
그리고 또 다른 시도를 시작했다. 전서체 붓글씨 공부.
생각의 흐름을 멈추기 위해, 나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움직임을 필요로 했다. 손으로 붓을 잡고, 먹을 갈고, 종이 위에 글자를 내려놓는 행위. 그것은 동시에 여러 생각을 할 수 없는 몸의 명령이었다. 붓이 종이 위에 그려지는 순간, 내 머리는 그 움직임에만 집중해야 했다.
혀놀림과 같은 붓놀림, 먹의 농담, 종이의 질감. 이 모든 것이 나를 현재의 순간으로 끌어당겼다. 하지만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다. 생각은 계속 흘러갔고, 불면증은 지속되었다.
2022년의 새벽은 이렇게 구성되었다.
책을 읽고, 생각을 기록하고, 붓글씨를 쓰고, 또다시 불면의 밤을 맞이하는 반복.
신체의 회복에 이어, 정신의 회복이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3월의 심근경색, 6월의 인터벌 트레이닝 성공, 그리고 2022년의 코로나 감염과 그 이후.
내 삶은 명확한 구분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무언가가 지평선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불면증의 밤에 읽은 경전들이 말하는 것처럼, 삶은 계속된다.
끝없이, 예측 불가능하게.
불면증 그 이후 다음 폭풍이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폭풍 속으로 걸어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