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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근경색 첫 주간: 회복과 새로운 일상

by 법의 풍경
계단 앞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지상까지 올라가는

고작 30여 개의 계단이 에베레스트처럼 느껴졌다.

천천히 해. 조금씩.


아내의 격려 속에서 첫 발을 올리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무리가 되는 건 아닐까. 평생 수천 번 오르내렸던 계단이 이렇게 낯설었던 적은 없었다.



새로운 아침의 의식

화요일 아침 6시. 평소와 같은 시간에 눈을 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달랐다.

식탁 테이블에 놓인 네 개의 약통.

아스피린, 클로피도그렐, 아토르바스타틴,

ACE 억제제. 이제 이 작은 알약들이 내 생명을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었다.

이제 이 작은 알약들이 내 생명을 지켜주는 파수꾼이다.

아침 식사 이후 물을 마시고 약을 삼키며 깨달았다.

이 평범한 행동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약을 하나씩 삼키며 생각했다. 이 작은 알약 하나가 내 혈관에서 혈전이 생기는 것을 막아주고 있다.

또 다른 알약은 콜레스테롤이 쌓이는 것을 방지해주고 있다. 과학이 만든 작은 기적들이었다.



재택근무의 의미 – 회복 속에서 일하는 법

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코로나19 덕분에 가능해진 원격 근무가 이토록 감사한 제도가 될 줄은 몰랐다. 만약 평상시였다면 출근을 해야 했을 텐데, 지하철을 타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부터가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홈오피스로 사용하는 작은 방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의 읽지 못해 쌓여있는 이메일들은 이미 천 개가 넘었다.

모습은 전과 같았지만, 나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하나씩 읽다가 지쳐갈 즈음 주제별로 분류한 뒤 가장 최근의 이메일만 읽으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 화상회의. 동료들은 업무보다 먼저 안부를 물었다.

“DK, 일해도 괜찮아?”
“무리하지 마시고 쉬면서 하세요.”

동료들의 따뜻한 말들이 화면 너머로 전해졌다.

예전에는 일 얘기부터 시작했는데,

이제는 건강이 대화의 시작이 되었다.



커피 한 잔의 철학 – 작은 순간의 기적

목요일 오후, 평소처럼 커피를 내렸다.

하지만 첫 모금을 마시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맛있었나?


평생 마셔온 같은 원두,

같은 방법으로 내린 커피였지만 맛이 완전히 달랐다.

더 진하고, 더 향긋하고, 더 따뜻했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밖을 내다봤다.

아파트 단지의 평범한 풍경. 나무들, 어린이 놀이터, 산책하는 사람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풍경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소중해 보였다.


특히 산책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걸으시는 모습이 지금의 나와 비슷해 보였다. 저분도 나처럼 건강을 되찾아가는 과정일까?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데 평소의 세 배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했다.



가족과의 새로운 대화

저녁 식사 시간도 달라졌다. 예전에는 TV를 보거나 휴대폰을 보면서 급하게 먹었다면,

이제는 가족과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먹었다.

오늘 어땠어?


아내의 질문에 예전 같으면 “뭐 그냥. 매일이 똑같지 뭐“라고 대답했을 텐데,

이제는 하루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얘기하게 되었다.

"오늘 재활하는데 트레이드밀 속도를 좀 더 올렸어”
“대단하네. 점점 좋아지고 있어.”


이 작은 성취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다.

예전에는 큰 프로젝트나 중요한 미팅 얘기만 했는데, 이제는 재활 훈련 이야기, 약 먹기, 커피 마시기 같은 작은 일들이 중요한 이야기가 되었다.



밤과 새벽의 불안

하지만 모든 것이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특히 밤에 잠들기 전이 가장 어려웠다.

혹시 잠들어 있는 동안 가슴이 아프면?

거의 50%의 확율로 1년 내에 재발한다고들 하던데

혹시 새벽에 응급상황이 생기면?

병원에서는 24시간 모니터링을 받았는데,

이제는 정말 내 몸의 신호에만 의존해야 했다.


첫날밤, 새벽에 깨어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규칙적으로 뛰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잠들 수 있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의사가 재활만 잘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


아내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아도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작은 성취들의 기록

금요일이 되자 스스로 작은 성취 목록을 만들어보았다.

✓ 재활훈련 빠지지 않기 (완벽)

✓ 커피 여유롭게 마시기 (매일 성공)

✓ 약 빼먹지 않고 먹기 (완벽)

✓ 심근 경색 발병 전부터 현재까지의 일을 기록해 두기(1편 작성)


사소해 보이지만, 이 작은 성취들이 회복의 증거였다.

특히 재활의학과에서 진행한 인터벌 트레이닝은 매일 조금씩 진전이 있었다.


처음은 속보 수준이었지만,

금요일에는 가볍게 뛰는 단계까지 올라섰다.


당시 백병원 재활의학과 주치의는 젊은 급성심근경색 환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벌 트레이닝’ 방식으로 재활하는 것의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임상 실험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해당 실험에 동참할 것을 서명하고,

다른 환자들과는 달리 인터벌 트레이닝으로 재활을 하기 시작했다.


(p.s. 결론적으로 6개월 재활을 마쳤을 때 나는 백병원 재활의학과의 기록을 경신했다. 물리치료사 말에 따르면 이제까지 백병원에서 심근경색으로 재활을 마친 모든 환자를 통틀어 내 기록이 가장 뛰어나다고 했다. 심지어 물리치료사 자신보다 내 기록이 더 뛰어나다며 칭찬했다. 인터벌 트레이닝의 효과인가?)

동료들의 따뜻한 관심

업무에서도 변화를 느꼈다.

평소엔 업무 얘기만 하던 동료들이 먼저 건강을 물었다.

“DK, 오늘 컨디션 어때?”
“무리하지 마세요.”


심지어 다른 계열사 사람들까지 안부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람들이 원래 이렇게 따뜻했나?
아니면 내가 달라진 걸까?’



주말의 의미

토요일 아침,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마음 편히 늦잠을 잤다. 오전 9시까지 잠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 몰랐다.


아내가 조심스럽게 깨웠다.

"일어나. 아침 먹고 약 먹어야지.”
“고마워.”


간단히 아침식사 후 약을 먹고 나서 침대에 그대로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이런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본 게 언제였나. 항상 무언가에 쫓기며 살았는데,

이제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창밖에서 아이들 뛰노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 몰랐다. 생명력 넘치는 소리들이 내게도 에너지를 주는 것 같았다.



신체의 솔직한 반응

하지만 몸은 여전히 예전과 달랐다.


조금만 빨리 걸어도 숨이 찼고,

계단을 오르면 심장이 빨리 뛰었다.

집중을 조금만 오래 해도 쉽게 피곤해졌다.


특히 오후 4시경이면 어김없이 피로감이 몰려왔다.

병원에서 말하기를, 심장근육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좋아질 거라고 했지만,

당장은 이 피로감과 함께 살아가야 했다.



새로운 루틴 - 재활훈련

회사의 양해하에 퇴원 후 매일 오후 2시,

새로운 일과표가 생겼다.

도봉산이 보이는 백병원 재활의학과 재활훈련실에는 트레이드밀 3대가 나란히 놓여있다.

항상 트레이드밀은 만원이었고,

나는 제일 젊은 재활환자였다.


재활훈련은 스트레칭 시간을 포함해서 한 시간.

심전도 장치와 혈압계를 부착한 채 인터벌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재활의학과 물리치료사가 운동 내내 내 심장상태를 모니터링하면서 강도를 높였다가 낮췄다가를 반복한다.


매일 내 상태에 맞추어 강도를 조금씩 높여갔는데,

처음에는 속보 수준이었다면 금요일에는 가볍게 뛰는 수준이 되었다.


남자 물리치료사는 매일 내 심장을 모니터링하며 강도를 조절했다.


지루할 법한 반복이었지만,

그는 늘 성심껏 환자들을 지도했다.

반복되는 업무에 싫증을 잘 내는 나 같은 사람은 하기 어려운 일 같아서 참 고마웠다.



감사 일기의 시작

목요일부터는 잠들기 전에 간단한 감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도 무사히 하루를 마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아내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합니다.

재활훈련 단계를 올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뭘 적을지 몰랐는데, 하다 보니 감사할 일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의 마무리 – 시간에 대한 태도


일요일 저녁, 일주일을 되돌아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한 주 전에는 중환자실에서 모니터링을 받고 있었는데, 이제는 집에서 일상생활을 하고 있었다. 물론 예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회복되고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시간을 대하는 태도였다.

예전에는 효율을 위해 시간을 쪼갰다면,

이제는 시간을 소중하게 쓰려고 노력했다.

빨리 많이 하기보다, 천천히 의미 있게 살기.

“어때? 첫 주간이?” 아내가 물었다.
“생각보다 괜찮아. 조금씩 적응되고 있는 것 같아.”


정말 그랬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어색했지만,

일주일이 지나니 새로운 리듬이 생기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궁금증도 생겼다.

이렇게 조심스럽게 살아야 하는 기간이 얼마나 더 필요할까? 언제쯤 예전처럼 활동적으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 몸속에서 지금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스텐트와 약물들이 어떻게 작용해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걸까?


하지만 몸은 여전히 예전과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을 알아야 했다.


독자 이해도 체크: 심근경색 후 첫 주간은 신체적 회복과 심리적 적응이 동시에 이뤄지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 점진적으로 활동량을 늘려가는 것이 중요하며, 새로운 생활 패턴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가족의 지지와 관심, 그리고 환자 스스로의 긍정적 마인드가 회복에 큰 도움이 됩니다.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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