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가드닝 일기 - 나는 생초보 가드너다
50년 만의 강추위라는 2022년의 12월이다. 올해 12월 중순 기온이 기상관측망이 본격적으로 확충된 1973년 이래로 가장 낮다고 한다. 아직은 어린 장미가, 올해 가을에 심은 어린 야생화들이 이렇게 추운 겨울을 잘 버틸 수 있을까, 손바닥 정원의 꽃들을 생각하면 마음만은 한여름처럼 타들어 간다.
왜 하필 내가 가드닝이란 것을 시작하니까 이런 강추위가 찾아오는 것일까? 왜 하필 어린 장미들을 마당에 심었더니 날씨는 이렇게 무자비해지는 것일까? 가드닝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기상이변 같은 건 뉴스에서 보고 지나가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매일매일의 날씨를 확인하며, 하루는 하늘을 향해 욕설을, 하루는 하늘을 향해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정원이 꽁꽁 얼어붙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눈 덮인 작은 정원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 밖에 없다. 그렇게 보고 있으면, 눈 위로 솟아나 있는 마른 잎과 줄기들이 지난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에 피었던 꽃들의 기억을 소환시킨다.
잠시 마법 같은 시간들이 펼쳐진다. 눈 덮인 정원은 하얀 도화지가 되고, 그 위로 형형색색의 꽃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저기에서는 에키네시아, 추명국, 사계 원추리, 여기에서는 층꽃, 메리골드, 샤스타데이지, 또 저기에는 장미, 수국, 라벤더가 자신만의 색깔과 모양과 향기를 뿜어내며 한 판 가득 춤 세상을 만든다.
하지만 이렇게 지난 계절의 아름다웠던 추억에만 빠져 있을 순 없다. 어떤 꽃들이 어떤 자리에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것도 겨울의 정원을 바라보면서 해야 할 일이다. 잡초와 에키네시아 어린아이를 혼동해 잡초를 애지중지 키웠던 것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소중한 꽃을 잡초라고 판단하고 서둘러 뽑아 버리지 않으려면 식물들의 대략의 위치 정도는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올해 봄, 마당 한 구석에서 덩치가 좀 있어 보이는 싹 세 개가 올라왔다. ‘아니 여기에서 왜 이런 싹이 나오지? 우리 집 마당에 정체불명의 식물이 나타났어!’ 한동안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긴 했지만, 이 아이가 정원에 해로운 존재일지도 몰라 뽑아내 버리려 했다. 하지만 혹시나 어딘가에서 새로운 꽃씨가 떨어져 싹이 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정체불명의 싹을 사진을 찍어 이미지 검색을 통해 인터넷을 한참을 뒤져 결국 정체를 알아냈다.
그 아이는 바로 왜성백합의 어린싹. 그제야 기억이 났다. ‘아 내가 지난봄 이곳에 백합을 마당에 심었었지’ 작년 초여름에 꽃이 지고 나서 스멀스멀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던 이 아이는 가을과 겨울 동안 마당 한 구석에서 묵묵히 웅크려 있다가 봄이 되어서 다시 태어났다. 작년에는 빨강 주황 노랑 각각 한 송이씩의 백합이었는데, 이제는 색깔마다 서너 명의 새로운 아이들을 잔뜩 데리고.
그런 고민의 순간들을 다시 만들지 않기 위해, 이번 가을에는 드라마 ‘도깨비’의 여주인공 대사처럼 ‘기억해야 해’를 반복하면서 새로 심은 꽃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시든 잎과 줄기만 남아 있는 지금도 정원을 바라보며 이 아이는 코레옵시스, 이 아이는 톱풀, 이 아이는 꼬리풀, 이 아이는 구절초.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이름을 부르고 있다.
1년 차 가드닝이다. 마당에 마구 뿌린 씨앗들이 싹이 나지 않은 것에 속상해서, 또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새 봄에 돋아 난 새싹들에 설레어서 2022년 봄에 가드닝의 세계로 들어왔다.
이제는 작년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갔던 이곳저곳에 피어 있는 꽃들의 이름을 하나둘 부르기 시작한다. 하늘을 올려다 보고, 땅을 내려 보고, 바람을 느끼고, 비를 기다리게 되었다. 찜해 놓은 쇼핑몰의 상품들은 나를 유혹하는 형형색색 꽃들로만 가득 차 있다.
가드닝을 시작하고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래도 바뀐 것들이 우리 가족을 속상하게 하거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한숨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내년에 이 작은 정원에 더 많은 꽃들이 더 가득 피어나면 함께 미소 지을 날이 많아질 것 같아 벌써부터 행복해진다.
가드닝은 설렘이라고 한다. 꽃은 피어날까, 어떤 꽃이 피어날까, 이 꽃들이 모여 정원에 어떤 색과 그림을 그려줄까. 매년 같은 종류의 꽃이 그 자리에서 나고 지지만, 또 매년 다른 느낌과 분위기, 그리고 다른 매력을 안겨 주는 꽃들. 그리고 정원에서 조금만 자리를 바꾸어 주어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꽃들.
체코의 세계적인 작가 카렐 차페크가 자신의 정원 에세이 ‘정원가의 열두 달’에서 ‘정원은 언제나 미완의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살이와 꼭 닮았다’라고 했다. 그래, 어쩌면 미완의 존재이기 때문에 설레는 것일 수도 있겠다. 가드닝을 시작한 나의 인생도, 나와 함께 하는 이 작은 정원도.
그럼 만화의 가드닝 일기. 올해는 이만.
(2022년 12월 3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