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한 계절이다

멀어짐의 흔적

by 숨 Breath

3부 1막 남아있는 진동


<멀어짐의 흔적>


멀어짐이 있었던 그해 가을부터였을까. 감정의 그림자가 드리웠던 때가.


누구 하나 예측하지 못한 새 빠르게 가까워진 사이가, 점점 자연스러워졌던 친밀감에, 마치 내가 관계의 소유권 하나를 손에 쥔 듯한 기분이 들게 했다.


노력했던 결과의 보상인 듯 자랑스럽게만 여겨지는 연결감이 만족스러웠다. 그전에 관계들에서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썼던 감각이 남아있어 그런지 완전히 빠져들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너는 너, 나는 나가 성실히 작동하지 않은 상태였다. 마음을 사로잡는 무한히 중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너는 모두와 잘 지냈다. 누구와 있어도 고정된 값이 있는 사람처럼 모두에게 똑같이 대했다. 그게 서운함의 시작이었다. ‘과연 나는 너에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여겨질까?’라는 의문이 자랐다.


네가 새로운 사람과 편안히 있는 걸 본다면 가까워진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을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 있지.’라며 존중하고 싶었지만, 실은 그때마다, 온기를 담아 둔 유리가 갈라진 소리를 들었다.



언젠가 그 유리가 깨어져 날카로운 말과 태도로. 언제는 거리감으로. 하지만 삐죽 나온 불꽃을 감추기도 어려운 들쑥날쑥한 마음에 피를 말리는 두통이 찾아왔다.


너는 경계가 분명하여 그 곁에 머물러도 되는지 허락을 바라게 된다. 널 알았다고 말하는 순간 경계를 세우고, 그 경계는 나를 물러서게 하며 내게 그 자격이 있는지 묻는 행동처럼 여겨진다. 그럼 나는 네가 바라는 건 내가 너를 알아주는 게 아니었구나. 그게 아니었구나. 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곁을 내어주고 싶은지, 그게 아니었는지. 너의 진짜 마음을 모르겠더라.


나와는 거리를 유지하며, 새로운 사람과는 친해지려는 노력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나는 우리가 전처럼 웃었던 농담을 찾았다. 하지만 더는 너에게 예전 방식의 습관과 농담이 통하지 않았다. 나의 노력은 무력했다.


마음은 요란하게 울려대는 초침처럼 조급해졌다. 이런 내가 소인배에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나는 서운함을 토로했고, 너는 똑같이 너의 거리를 유지했다. 답답했다. 말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넌 그저 똑같이 행동했을 뿐이었다. 나와 시간을 보낼 때 전과 같지 않은 묘한 친밀감은 유지했지만, 더는 다가갈 수 없이 굳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나를 알아봐 주는 듯한 이 관계가 좋아서 더는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너는 나와 한 약속을 잊고, 다른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심지어 너는 그 약속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내가 잊힌 느낌이었다.



겨우 잠재웠던 방황의 불꽃이 결국 나를 삼키려 했다. 통제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이런 마음을 다 태울 듯한 거센 불바다는 처음이었다.


너에게 따졌다. 너는 그 후로 태도가 바뀌었다. 나를 제외시키고, 그게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대했다. 더는 친밀한 시간은 없었다.


나는 바뀐 이 상황을 멍하니 느낀 채 파악하려고 했다. 약속을 잊은 건 넌데 사과는 없었고, 오히려 기억하지도 못한 약속에 사과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또한 네가 벌린 거리를 유지하며 생각의 늪에 빠졌다. ‘왜 이렇게 됐을까?’ 하지만 이미 다 타버린 재로 무엇을 분별하랴. 보이지 않았다. 그 일로 너를 잃게 될 줄 몰랐다. 알았다면 아마 나는 말하지 않았을 거다. 그랬을 거다.


이대로 멀어지는 것만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싫었다. 분명한 끝과 모호한 원인에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 물음들은 그대로 내게 상처가 되었다.


불편하다는 말, 더는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말, 필요한 말만 하자는 말 그리고 너는 이미 나의 존재를 지운 듯한 태도, 나만 멈춘다면 더 행복해 보이는 일상.



그게 비참했다.



몇 번의 거절에 모든 희망을 잃고, 그제야 더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미 나와 멀어지기로 결심한 너에게 매달린 나는 너의 모든 언행에 아파 와 너무도 쉽게 나를 울렸다.


네가 바라는 대로 더는 신경 쓰지 말아야 했고, 궁금해서도 안 되었다. 바뀐 건 하나뿐인데, 살아가는 건 버티는 게 되었다. 다음 나날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내일을 살아야 하는 숨이 붙어있는 인간이기에,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 너는 없는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하기 위해 너와 관련된 사람들과도 멀어지기로 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멀어진 이유에 대해 몰랐다. 너는 얘기해주지 않았고, 나는 돌아보지 않았으니. 어떠한 이유에서 멀어짐을 선택했는지 듣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었다. 그게 무엇이든, 이미 불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너에게 나는 그 정도의 존재였던 것일까. 나에겐 소중했던 그 시간이 너에겐 아무런 말 없이 그냥 그렇게 버릴 수 있는 시간이었던 건가. 예상하지 못했던 단절은 급성통증과 같은 고통이었다. 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이 남아있다.



양가감정. 반가움과 경계. 기다림과 회피. 기대와 불안. 애와 증. 혼란스러웠다.


어떤 감정도 모두 자기편을 들어달라며 아우성치고는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고, 제 무게를 달고 있었다.


처음 내 편이라 여겼던 사람에게 그 직감이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사실이 강요되듯 너의 선택으로 밀려났다. 너는 내 편이 아니었다. 그 후 나의 스물은 미리 예방접종을 맞은 듯 사람에 대한 신뢰가 사려졌다. 웃을 순 있어도, 믿을 순 없었다. 그건 너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멀어진 후, 그 생각은 바뀌었다. 너를 조금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너는 멀리 있고, 그런 너의 입장을 나는 알 리 없고. 이제는 나의 입장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가진 상처가 제일 커 보였다.




멀어질 때 다짐했었다. 결코 너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다시는 너와 그 무엇도 함께하지 않겠다고. 더는 다가가지 않았음에도, 나를 피했던 너를 본 적이 있었다.


나를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충격이었다. 그럼에도 너 앞에선 풀려버리는 다짐이라 알게 되었다. 그날의 다짐은 비참함을 버티기 위한 말에 가까웠다.


지난 움직임으로 회복되지 않은 자존심에 먼저 연락은 못 하겠지만, 연락이 닿는다면 풀고 싶었다. 그렇게 지난 일에 생긴 상처에서 비롯된 결자해지라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나를 태웠던 그 뜨거운 소란도 시간이 흐르자, 결국 시린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 모든 혼란이 지나는 때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왔다.




매년 겨울이 올 때면 계절 중 가장 아름답게 핀다는 꽃이 생각난다. 그 말을 들은 지 몇 년이 지났지만 난 보지 못했다.


듣기론 다른 계절보다 더 뽀얗고, 낮은 기온 탓에 살짝 홍조가 내려앉아 더 예뻐진다더라. 흰 바탕에 불그스름한 빛이 얹어진 꽃이었을까.


끝내 나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코끝이 찡해질 때면 네가 생각난다.


유난한 계절이다.


내가 가진 궁금증과는 별개로 넌 올해도 아름답게 피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