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목적지를 바꿨다

최초의 감각

by 숨 Breath

3부 1막 남아있는 진동


<최초의 감각>


일찍 나왔다. 학교에서 먹을 초콜릿을 샀다. 2+1이길래 1개는 아몬드가 있는 초콜릿, 2개는 오리지널 초콜릿. 시간이 남았다.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나와 달리 넌 학교 근처에 살았다. 가방을 내려놓고, 너의 집 쪽으로 향했다. 그럼 곧 너를 만날 수 있었다. 덕분에 심심하지 않다며 나를 반겼다. 발길을 돌려 학교로 향했다.


등굣길에는 매화와 벚꽃이 피어있었다. 평소 관심이 없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은 것들이 많은 난, 벚꽃만 가득한 줄 알았던 그해 봄에 매화를 기억하게 되었다. 넌 사소한 것에도 지나치지 않았던 것들이 있었다. 부드러운 면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너의 필통에 아침에 사둔 초콜릿을 넣어두었다. 넌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오리지널 초콜릿을 좋아한다. 난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앉고, 너는 자리에 앉아 필통을 열었다. 초콜릿을 보고는 고마운지 내 등을 치곤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한다.


너를 만나기 전, 이미 난 마음에 얹어진 불같은 게 있었다. 흥미를 잃은 공부와 나를 가두는 시간. 오랜 답답함에 방황하고 있었다. 너는 그런 나를 챙겼다. 매일 영어 단어를 외우게 했고 검사했다. 강요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챙겨주는 네가 싫지 않았다.


너는 자주 지루해했다. 그 지루한 시간이 지나면 우린 복도를 돌며 시간을 보냈다. 지루한 표정을 짓는 너를 웃게 하고 싶었다. 무표정일 때의 모습과 웃을 때 짓는 표정이 전혀 달라 그 온도 차이가 좋았다. 무엇이 좋고 싫은지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짓는 너의 표정들이 좋았다. 살면서 순간에 들어오는 작은 기쁨도 네 표정에 스며 숨길 수가 없었지.



어디선가 손가락을 다쳤다. 다친 손을 보더니 너는 밴드를 붙이곤 다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내 손가락에 밴드를 붙이는 네가 이상했다. 아니, 내 기분이 이상했다. 그래서 너에게



“또 다쳐야겠다. 다치니까 이렇게 챙겨주고. 반하겠어.”



장난스럽게 말했다. 너는 웃고 말았다. 그 기분이 이상해 지나가는 다른 친구에게 “나 손가락 다쳤어.”라며, 손을 내밀었다. 다른 친구는 “어떻게 많이 부었다.”라며 붓지 않은 손가락을 걱정했다.




혼자 복도를 거닐 땐 누군가 너의 위치를 알려 줬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럼 곧 너를 만났다. 이 말을 하자. 누군가가 너에게도 나의 위치를 알려줬다고 한다. 그게 웃겼다.




야자가 끝났다. 학교 앞이 아니라 너의 집 근처에서 버스를 탔다. 자연스럽게 얘기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조용한 밤에, 모든 하루가 지나가는 그 밤에, 무더운 열기가 지나고, 조금은 선한 바람이 불었던 그 밤에 걷는 게 좋았다.



주말 아침은 대부분 너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어디냐는 연락. 빨리 오라는 연락. 주말은 자유로웠다. 학교에 가기 전 조조영화를 보기도 했고, 밥을 먹고는 동네를 돌며 산책하기도 했다.


시켜 먹을 때도 있었다. 너는 직접 전화하는 대신 주문 대본을 적어주었다. 내 휴대폰으로 전화했는데 떡볶이집 사장님은 너의 이름을 대며 맞냐고 묻는다. 언제 너의 이름으로도 시켰나 보다.




어느 방학 여느 때, 한 번은 야자실이 아닌 다른 지역도서관에서 공부하자고 한다.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갈지, 학교로 갈지 묻는다. 너는 집으로 간다고 한다.


나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학교로 향하기로 했다. 우린 버스를 탔고 거의 도착할 때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우산이 있었고, 너는 우산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jaeman-jung-nRCFMEDCgh8-unsplash.jpg


너의 집 근처에서 내렸다. 집에 데려다주고, 난 학교에 갔다. 혹시나 했던 걱정이, 네가 알지 못한 선택에 잔잔한 온기를 가지게 되었다.


우산이 소용없었다. 처음으로 그 길이 길었다. 이미 젖은 옷에 야자실 에어컨은 상극이었다. 너는 내게 웬일로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연락을 남겼다. 나는 그런 날도 있다고 했다. 혹시 네가 미안함을 느낄까, 조금이라도 앉아 있다가 오고 싶었다. 내 선택이었음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한 번은 다른 무리에 친구들이 학교 끝나고 카페에 가자고 했다. 그들은 나에게 요즘 자기들과 보내는 시간이 짧아 서운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랬냐며, 미안하다고 했다. 개선해 보겠다고 말하고, 조금은 멍한 느낌으로 학교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쯤 너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은 뭐 하냐고, 혼자냐고. 나는 혼자 아직 정류장이라고 했다. 너는 잘됐다며, 밤 산책을 하자고 했다.



그날도, 나는 목적지를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