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트립 Oct 28. 2022

중년부부 한달살기는 한달전쟁

따로또같이 여행법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가 '한달살기 여행' 중이라고 하면 내 또래 중년 여자들의 공통된 첫마디는 다음과 같다.

"아유, 좋으시겠어요. 부러워요. 멋지게 사시네요."


몇 마디 말을 더 터서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면 내 눈치를 살짝 보며 두 번째 건네는 말은,

"어떻게 그렇게 남편과 한 달을 같이 다닐 수가 있죠?"

"난 친구랑 한 달은 여행해도 남편과는 절대 못해요!"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이삼일은 몰라도 한 달간 같이 다니는 건 상상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광주의 한 식당에서 만난 60대 여성은 내게 훈계하듯 단호히 조언했다(이 날은 나 혼자 식당에 갔음). "여행은 친구랑 다녀야지. 남편과 다니면 재미없어!"


사실 나도 남들 이야기에 백 프로 아니 천 프로 공감하고 인정하고 동의한다. 같이 다니니 속 모르는 남의 눈에만 좋아 보일 뿐, 들여다보면 '한달살기는 한달전쟁'이나 다름없다. 싸웠다 휴전했다를 쉴새 없이 반복한다.


나주에서는 차량 정차 위치 때문에 언쟁이 붙어 남편이 핸들을 내게 넘기고 차에서 내린 적도 있다. 점심도 각자 먹고 3시간 후에 다시 만나 차를 같이 타고 숙박지인 나주 세지면으로 돌아갔다. 부산에서는 아침에 현관을 나서 버스 타러 가다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충돌이 생겨 그 길로 헤어졌다. 그날은 하루 종일 따로 다니다가 저녁에 숙소에서 만났다.


여행 중 헤어진 날 점심, 식당 도착 시간이 서로 달라, 결과적으로 같은 식당에서 30분 간격으로 각자 먹게 된 나주곰탕


중년 부부 사이에 떠도는 말로 '부부는 영화 취향과 정치 성향만 같으면 다 맞는 거다.'란 말이 있다. 난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부부는 영화 취향과 정치 성향이 같은데도 종종 다투기 때문이다.


30년 넘게 살아오면서 아이들 양육, 부모님 부양과 가족 관련 일은 잘 합의했고 싸운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런데 여행을 나오면 사소한 것에서 부딪힌다. 여행에서는 24시간을 거의 같이 붙어있다시피 하고 거의 모든 활동을 같이 하게 된다. 각자의 성격과 취향과 습관이 조금씩 다른데 일상에서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다가 여행에서는 부각된다. 우리 두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아이들 눈치를 보거나 주변을 의식할 일이 없어 참지 않는 것도 문제다.


남편은 법을 잘 지키고 고지식하다. 난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부려야 한다는 주의다. 남편은 어딜 가면 감상에 잘 젖는 편이다. 이걸 감성적이라고 해야 하나? 예를 들자면 벽화마을은 남편에게 '블랙홀'이다. 벽화마을에만 가면 구석구석 모든 벽화가 예뻐보이기 때문에 하염없이 죄다 사진을 찍고 있다. 내가 잔소리를 해서 데리 나와야 다음 일정이 진척되는 식이다.


이미 자신의 세계가 공고해진 중년의 우리가 서로를 설득해 바꾸는 건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덜 충돌하며 여행하는 방법으로 시도해본 것은 '간헐적으로 떨어져서 다니기'였다.


<사례1>

3월 부산 여행에서는 따로 다니는 요일을 정해, 때론 같이 때론 따로 다녔다.
1) 새로운 도시에 갔을 때 첫 주는 '도시 탐색 주간'으로 정해 같이 다닌다.
2) 두 번째 주부터는 주 2회 화요일과 목요일을 따로 다닌다.(서로 다녀온 곳을 추천해주기도 함.)
이렇게 하니 자동으로 갈등 횟수가 줄었다. 때때로 같이 밥사먹는 짝꿍이 되어줘서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사례2>

서울과 광주에서는 테마별로 같이 다니거나 따로 다니는 방법으로 여행했다.
1) 도심 관광은 각자 간다. 각자 그날 관광할 곳을 정하고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 다닌다.
2) 등산이나 산책, 트래킹은 같이 다닌다.


<사례3>

일주일에 두 번 반나절 정도 공간 분리를 한다.  
도시가 아닌 곳, 대중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시골인 고성과 청송에서는 각자 활동이 쉽지 못했다.
주 2회 내가 지역 도서관에 가는 동안 남편은 집에 있거나 산책을 했다. 반나절을 떨어져서 보낸 후 만나서 점심을 같이 먹고 오후에 공동 활동을 했다.


위 모든 사례의 전제는 '숙박지는 방 2개 이상이거나 적어도 거실과 방이 분리되는 투룸형의 구조여야 한다'는 것이다. 숙소에서의 공간 분리는 필수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여행을 정리하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등 고유한 활동이 프라이빗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여행이라는 활동이 조직이나 일상을 벗어나 각자의 관심과 욕구에 매우 충실한 활동'이기 때문에 서로 충돌이 생기는 것 같다.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노력도 하되, 동시에 시간과 공간을 조금만 분리시키면 원천적으로 갈등을 덜 만들 뿐 아니라 여행의 요소와 감흥을 각자의 내면에 더 풍부히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따로 또 같이 여행'을 하자는 거지.




이전 09화 귀농도 귀촌도 아닌 시골 한달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