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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Sep 20. 2022

냉장고 없이 한달살기

부산 한달살기 앵콜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달살기 앵콜이다. 3월에 왔던 부산을 여름 끝자락에 다시 왔다.

      

부산의 지인으로부터 제안이 왔다. 이사하게 되었는데 살던 집 전세가 나가지 않는다고 9월 한 달을 지내보겠느냐고. 한달살기 집 구하느라 부동산을 전전하던 설움이 떠올라 덜컥 수락해버렸다. 부산은 한달살기 첫 도시라 첫사랑 같았다. 올봄 3월 한 달을 지내고 떠날 때 우리 부부 이구동성으로 딱 한 달만 더 있고 싶다고 했던 곳이다. 말이 씨가 되니 좋다!

      

오픈형 원룸이니 투룸이니 다세대살이 석 달-3월의 부산 대연동, 6월의 서울 남가좌동, 8월의 광주 쌍촌동-만에 부산 부도심의 고층 아파트라니. 하루아침에 주거 신분이 수직 상승해버렸다.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이 반지하집에서 박사장의 저택을 접수한 상황에 견줄만하지 않은가.

     

가구가 없으니 공간이 남아돈다. 갓 인테리어한 흠잡을 데 없는 실내에서, 부자들만 한다는 ‘공간 플렉스'-과시. 당연히 낭비를 수반-를 하며 지내는 중이다. 주변 환경은 또 어떤가. 아파트 출구만 나가면 공원과 도서관이다. 길 건너 대형 마트가 있고 지하철역도 걸어서 5분이요, 낙동강변 생태공원도 지척이다.

    

지난 3월은 남구 대연동을 베이스타운 삼아 부산의 바닷길을 섭렵했고 해안가 산복마을을 다 훑었다. 이번 집은 북구 화명동으로 금정산과 낙동강이 가깝다. ‘해안 부산’이 아닌 ‘내륙 부산’을 여행하기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거점이 또 있을까.

     

그.래.도.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나 보다. 없 것 없을 것 같은 이 집에 ‘결핍’이 하나 있으니, 바로 ‘냉장고의 부재’다. 중고 냉장고를 한 달간 빌려 쓰는 것도 알아봤고 당근에서 중고로 사서 쓰고 되팔까 생각도 해보았다. 결론은, ‘냉장고 없이 한 달 살기’로 했다.

     

9월이니 한여름은 지났고 날씨는 점점 우리 편이다. 고층 아파트의 바람 잘 통하는 북편 베란다가 냉장고를 대신해 '식품 저장소’가 되어줄 것이다. 감자와 양파, 과일은 일주일은 보관 가능하다. 그런데 얼음물이나 차가운 맥주는 마실 수 없잖아? 그땐 '편의점 냉장고 찬스'를 쓴다. 아파트 앞 편의점 냉장고를 내 집 냉장고처럼, 차가운 게 먹고 싶으면 언제든 들락날락...

    

몇 년 전 여름에 노르웨이를 두 주간 캠핑 여행한 적이 있다. 노르웨이 8월 날씨가 우리나라 9월 날씨와 비슷하다. 그곳에서 며칠씩 생식품 재료를 차에 실어 다녀도 별 문제없었다. 한달살기로 실내 캠핑 온 셈 치기로 했다.

     

냉장고 없이 지낸 지 4주째다. 냉장고 없이 잘 살고 있을까?

냉장고 없이 살아보니,
- 장보기를 소량으로 자주 하게 되었다.  
- 재료를 구입할 때는 해 먹을 요리의 종류를 먼저 떠올려 본다. 특히 푸른 채소류는 극도로 소심하게 구입한다.
- 음식을 한 끼 먹을 분량만 한다. 야외 캠핑할 때처럼
- 한 개의 재료를 며칠간 집중적으로 소비하다 보니 한 개의 재료로 다양한 요리를 하게 된다.
  (평소 잘해 먹지 않던 온갖 창의 요리가 등장...)
  (예) 배추 1포기 – 배추물김치, 배추전, 찐배춧잎쌈, 배추된장국
        단호박 1개 – 단호박 쪄먹기, 단호박스프, 단호박전, 단호박샐러드
- 단점 : 같은 재료를 연달아 먹게 된다는 점. 오늘 저녁도, 담날 아침도 담날 저녁도 감자요리...

     

우리집 식품저장소, 일주일 전(왼)과 일주일 후(오)


신선한 재료를 그때그때 조리해 먹었고, 무엇보다 재료와 음식의 '양'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당연히 음식물 쓰레기도 줄었다. 이거 너무 정해논 답?


알배기 배추 한 포기는 배추물김치, 찐배춧잎쌈(강된장), 배추전으로...

    

단호박찜과 토마토계란탕(왼) & 단호박스프와 야채단호박전(오)


감자전피자(왼) & 감자스프(오)


그동안 넘치는 먹거리 속에서 살았다. 냉동실엔 정체 모를 식재료가 한가득이요, 몇 년째 냉동실 구석을 차지하는 것도 있었다. 냉장칸도 썩어 버리는 야채는 물론, 음식이 몇 주째 방치되기 일쑤였다.


한우등심구이와 된장국(왼) & 호박잎쌈(오)


여행지가 아닌, 내가 원래 사는 우리 집의 냉장고는 현재 시한부다. 냉동실 대류가 잘 안 되어 멈추는 일이 일 년에 몇 번씩 생긴다. 그때마다 냉동실을 다 비워내고 배선부에 달라붙은 성에 덩어리를 녹여내고 재가동하곤 한다. 조만간 냉장고를 교체해야 한다.

      

자본은 얼굴이 없다. 집집마다 대형 냉장고에 김치냉장고, 심지어 전용 냉동고까지 사들이게 유혹한다. 또 그 속을 조리 및 반조리식품으로 가득 채우게 부채질한다. 우리네 식생활은 냉장고의 출현을 기준으로 '냉장고 이전과 냉장고 이후'로 나뉜다. 음식을 더 잘 보관해주는 냉장고를 가진 이후로 음식물을 더 많이 버리게 된 건 냉장고의 역설이다.


잠시나마 냉장고없이 지내보니 풍요로움에 넘쳐있었던 '나의 주방생활'이 들여다보다. 미니멀리스트까진 아니라도, 생활도 슬림해지고 싶어졌다. 새 냉장고를 너무 크지 않은 것으로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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