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는 제주의 구좌읍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봤는데 오늘은 서울 남가좌동의 백련시장에서 야채와 과일을 샀다. 한달살기하니 축지법이라는 초능력이 생겼나 보다. 축지법을 쓰지 않고서야 어찌 제주에 번쩍 서울에 번쩍할까.
3월 부산에서 시작된 한달살기가 거제, 제주를 거쳐 네 번째 달에 접어들었다. 6월의 도시, 서울에 왔다. 원래 서울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거니와 친구의 아들이 5월 말에 대학가 자취방을 뺀다고 하길래 내가 '한 달 사용 승계'를 받았다. 덕분에 대학가 투룸에 서울 한달살기가 안착되었다.
서울, 또 한 달 잘 살아보자!
한달살기를 몇 달째 해보니 매달 시작 때마다 반복되는 루틴이 있다.
한달살기로 현지에 왔다면 시작은 짐 옮기기다. 한달살이가 반복될수록 짐이 조금씩 줄어든다. 공동물품은 침구류, 주방 및 욕실용품, 식료품 및 양념 가방. 이렇게 가방 세 개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각자 옷과 개인물품을 넣은 배낭이다. 숙소 상황에 따라 책상이나 식탁 용도로 접이 탁자와 의자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숙소에 짐을 들이다 보니 양념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아, 이 싸한 느낌의 정체는 뭐지???" 차에 싣는다고 아파트 주차장에 내린 건 확실한데 싣는 과정에서 빠트렸나 보다. 몇 달 째하니 이것도 매너리즘에 빠지나. 여행 짐을 흘리고 다니다니. 하필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양념 세트라니. 식용유를 비롯해 참기름, 들기름, 간장, 소금, 식초, 후추, 매실청.... 한달살기에 최적화된 사이즈로, 요리를 위한 모든 양념이 다 든 나의 '비법 양념 가방'은 그렇게 허무하게 나를 떠나갔다. ㅠㅠ 슬픈 일은 빨리 잊어야지. 마트에 가면 다 있는 것들 아닌가. 이제 내 나이에 '복구할 수 있는 문제는 문제도 아니다.'
한달살기 현지에서 두 번째 하는 일은 장보기다. 중국에서는 송나라 때부터 생활에 필요한 7가지로 '땔감, 쌀, 기름, 소금, 간장, 식초, 차'를 꼽았다는데(开门七件事,柴米油盐酱醋茶) 실제로 한달살기 여행을 해보니 현대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에겐 취사든 난방이든 밸브만 열면 전천후로 해결해주는 도시가스가 있으니 땔감은 뺀다. 대신 쓰레기봉투를 끼워 넣는다. 쓰레기봉투는 여행하지 않으니 현지에서만 사서 쓰는 쓰레기봉투는 한달살기 생필품 영순위다.
내 경우, 한달살기로 가는 도시마다 마트에서 처음 사게 되는 물품은 품목이 거의 정해지더라.
사실 (1)은 쓰레기봉투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집의 것을 덜어서 갖고 가는 편이다. (2)는 현지 첫 장보기 필수 목록으로 숙소 냉장고에 일차로 채워 넣는 것들이다.
몇 달째 여행살이를 하면서 느낀 점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우린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이고 지고 살고 있다. 충분함을 넘어 넘치게 있는데도 또 새것을 사도록 강요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는 어찌나 영리한지 '유행'이란 이름으로, '스마트한 소비'란 포장으로, 각종 물건을 끊임없이 사게 만든다.
한달살기 몇 달하고 5월 말에 내가 살던 집에 들렀더니 불필요한 물건이 얼마나 많이 눈에 띄는지 창고에도 베란다에도 주방 서랍에도 한가득이었다. 다 정리해서 버렸다. 당근에 내다 팔기도 하고 나눔도 했다. 덕분에 집 안의 수납공간 곳곳에 빈칸이 생겼다. 살림살이가 슬림해지니 내 몸도 날아갈 것 같았다.
한편 서울에 오자마자 당근을 통해 미니오븐을 샀다. 남가좌동으로 동네 인증을 하니 홍대 입구에서 물건을 수령하는 조건으로 나온 상품이 있어 구입하게 되었다. 동네 사람이랑 동네에서 중고 거래를 하니 내가 진짜 현지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이건 미니멀리즘으로 가는 한달살기에 반하는 것 아닌가. ㅎㅎ 그래도 난 오늘도 '내 속의 맥시멀리스트를 미니멀리스트가 이겨주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