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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트립 Oct 18. 2022

귀농도 귀촌도 아닌 시골 한달살기

집에 대해 쓸모있는 사람 되기 / 청송

퇴직 후 '한달살기 전국일주' 중입니다. 한달살이와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구에서 영천IC를 지나 청송으로 들어서자 유난히 사과나무가 많았다. 사과가 볼그스레 익어가는 계절에 청송 산골 사과밭 마을 속으로 훅 들어갔다.


이곳은 청송사과의 본향, 산(山) 반(半) 사과 반(半)~


이번에 한 달간 지낼 집은 경북 청송군의 20년간 비우다시피 한 집이다. 2002년에 세컨드 하우스로 지어 놓고 초반 몇 년 외에 십여 년 넘도록 거의 이용 안 한 집이 한달살기 거처가 되었다.


청송 집에 와 보니, 난방과 전기, 수도 이 세 가지는 정상이었다. 그.러.나,

1) 가스레인지 가스불 점화가 되지 않았다.

2) 냉장고는 곰팡이 천국이다.

3) 세탁기는 연결이 필요하다.

4) 방충망이 삭아서 뜯어다.

5) 커튼도 필요하다.

6) 방문 문고리와 싱크대 손잡이가 녹슬었다.

7) 폐대형TV와 폐오디오, 폐수납장이 집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8) 와이파이가 없다.


집주인이 도대체 누구야? 집을 지어놓고 이토록 방치하다니. 집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자집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


욕 얻어먹을 만도한 집주인은 누굴까? 부끄럽게도 바로 나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는 1/6의 주인이다. 나를 포함 여섯 가구가 20년 전에 공동으로 출자해서 지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의기투합해서 지을 때 우린 젊었고(무려 30대!) 평생 자주 모여서 재밌게 지낼 보금자리가 될 줄 알았다.


여럿이 주인인 집은 주인이 없다. 공산주의가 실패하는 원리와 같다. 지분은 1/6이되 개인이 집에 갖는 책임감은 1/6이 아니라 1/∞, 0에 가깝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섯 가구가 지금도 친밀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집도 쓰러지지 않고 제 자리에 건재하다는 점이다.


한달살기로 7군데의 거처를 옮겨 다니며 살다 보니 '집이란 무엇인가' 싶었다. 광주와 부산에서 다세대 원룸, 서울에선 단독주택 2층 투룸에서 살았다. 제주에선 농가주택에서, 강원도에서는 어촌의 독채 별장에서 살았다. 부산과 거제에선 25평과 33평 아파트에서 각각 한 달씩 지다.


남의 집을 한 달씩 빌려 살아보니 집이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곳, 휴식과 안정을 제공하고 반복적으로 사람을 재생시켜주는 공간이라는 사실이 새삼 소중하게 느껴졌다. 동시에 내가 주인으로 있으면서 시골마을 한가운데 내던져 둔 집에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누군가의 따뜻한 울타리가 될 수 있는 곳을 쓰지 않는 건 집에 대한 예의가 아닐 뿐 아니라 빈 집 하나 더 보탠 격이니 마을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시골집에서도 한 달을 살아보기로 했다.


역시나 예상대로 집에 들어선 첫인상은 서글펐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청소와 쓰레기 버리기는 내 의지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세탁기를 주방에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방충망은 어떻게 설치해야 할지 막막했다. 평생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옮겨 살면서 이사만 하면 세탁기는 자동으로 다 연결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수도배관에서 입수관을 어떻게 뽑아내야 하는지, 배수 호스는 어디에 꽂아야 하는지, 수도꼭지는 별도 어댑터가 필요한 지에 대한 고민 따윈 필요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 한 달을 살려니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다.  

1) 가스레인지 가스불 점화가 되지 않았다. -> 가스레인지와 프로판가스통을 철거하고 전기 인덕션 연결했다.

2) 냉장고는 곰팡이 천국이다. -> 냉장고 특별 대청소를 거쳐 식재료를 넣었다.

3) 세탁기는 연결이 필요하다. -> 싱크대 한 칸을 빼낸 자리에 세탁기를 위치시키고 연결했다.

(주방 싱크대 수전에서 입수관을 빼내기 위해 T자 밸브와 수도꼭지 어댑터를 구입해 연결)

4) 방충망 뜯어졌다. -> 밸크로(일명 찍찍이)식 접착 방충망을 구입해서 모든 창문에 붙임.

5) 커튼도 필요하다. -> 광목천을 구입해 커튼을 만들어 걸었음.

6) 방문 문고리와 싱크대 손잡이가 녹슬었다. -> 문고리손잡이 교체

7) 폐대형TV와 폐오디오, 폐 수납장이 집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 스티커를 구입해 폐기

8) 와이파이가 없다. -> 한 달간 와이파이 공유기 대여 서비스 이용(이런 게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신기 ㅎㅎ)


T자밸브와 수도꼭지 어댑터를 사서 어찌어찌 세탁기를 연결했다.


커텐을 다니 창문에 표정이 생겼다. 한결 집 다워졌다.  


휴~~ 이 모든 일을 하는 데 열흘이 꼬박 걸렸다. 산골 오지 집 앞까지 택배가 하루가 멀다 하고 착착 들어와 물건을 안기고 가는 게 신기했다. 인터넷과 빠른 택배는 산골에서의 고립감과 불편함을 덜어주는 일등공신이었다. 식탁과 의자 조립하기, 무거운 물건 들고 옮기기, 창틀에 매달려 방충망 붙이기 등 평소 안 하던 일을 했더니 온몸이 다 쑤셨다. 맑은 공기 속에서 몸을 움직인 대가는 숙면이었다. 밤마다 기절하다시피 잠을 잤다.


집이 하나씩 수선되자 나 자신이 '집에 대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벼가 자란다고 한다. 한달살기 우리집도 나와 남편의 발자국에 살아나기 시작했다. 귀농도 아니고 귀촌도 아닌 시골 한달살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일부턴 백석탄과 만안자암 단애, 방호정까지 과수원길따라 물길 따라 걸어봐야겠다. 사과 익는 계절엔 청송을 걸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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