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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한시 Nov 06. 2021

여자의 적은 여자야

제발 너나 잘하세요 

직장 생활하면서 생각보다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역시~~ 여자의 적은 여자라니까"


몇 년 전에 새로운 팀의 행정업무를 위해 여직원 두 명을 뽑았는데, 몇 달이 지나자 그 둘의 냉랭한 분위기가 옆을 스치기만 해도 느껴질 정도였다. 같은 사무실을 쓰는 남자 직원 말로는 그 둘이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다고 했다. 그 팀의 남자 팀장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상황이 새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역시 여자들끼리는 사이가 안 좋아. 여자 둘을 뽑는 게 아닌데, 괜히 뽑은 것 같아요"

"아니, 그건 저 둘의 문제이지, 그걸 왜  일반화시키세요. 여자들끼리 오히려 죽이 잘 맞아서 일 잘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괜히 발끈하며 여자들의 동지애를 강조하고 나섰다. 하지만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찔렸던 느낌이 들었던 건, 조금은 충격적이기도 했던 오래전 기억 때문이다. 

그때 나는 입사한 지 몇 년 지났을 때고, 서로 존중해주는 우리 회사의 분위기가 참 좋다고 생각했다. 물론 겉으로 보이는 태도가 얼마나 큰 진심을 반영하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많은 회사가 비슷할 것 같지만, 내가 일하는 곳도 연말이 되면 한 해의 성과를 정리하고 보고서를 제출해야 하는 등의 일로 무척 바빠진다. 그날도 보고서 작성 때문에 회의를 하던 중이었는데, 업무담당 및 진행상황을 체크하다 보니 담당자 중 한 명이 출산휴가 중이라서 대체인력이 없었다. 휴가 중인 사람한테 보고서 이야기를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그 부분을 빼고 진행할 수도 없고... 어쩌나 하는 와중인데, 회의를 진행하던 여자 부장 둘이서 너무 편하게 이야기를 막 했다. 


"아휴, 앞으로는 보고서 기간에 애를 못 낳게 해야겠어, 하하~"

"그러니까 말이야. 우리는 일도 다 해놓고 애 낳으러 갔는데. 호호~


그때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이 여자였고, 부장급은 그 여자 부장 둘밖에 없었으니 서로 편하게 농담을 주고받았으리라.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게 같은 여자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이미 10년 전에 "라떼는 말이야"를 시전 하신 두 여자 부장을 보면서 나는 경악했다.  

그런 경우가 있다 보니,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말은 얼토당토않는다며, 진심으로 억울해할 수도 없었다.




이후에도 단지 직장에서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여자를 못 살게 구는 것은 여자'라는 말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들을 수 있었다. 나랑 이야기하던 한 남자 의사 역시 "맞아요. 남자 교수보다 여자 교수들이 여자 레지던트한테 더 심하게 대해요"라며 심하게 긍정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본 것도 있으니 무조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러는 것일까? 곰곰이 살펴보니 생각해보니 몇 가지가 걸렸다. 한 편으로는 반박이 될 수도 있고, 한 편으로는 변명이 될 수도 있겠다. 


우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대부분의 여자는 남성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분위기에 적응했고,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에는 '남성의 역할', '여성의 역할'이라는 표현 자체가 조심스럽지만, 아직까지 가정을 돌보는 것은 여자들이 더 많은 부분을 짊어지고 있다. 

앞선 말한 우리 회사의 여자 부장들은 휴일에도 일을 위해서 출장을 다니고, 새벽까지 이어지는 회식에도 빠지지 않았다. 본인들이 가정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분위기에서 살아남다 보니, 가정일 때문에 일에 지장을 주는 직원 (많은 경우 여자 직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한 명의 여자 부장은 결혼 후 집들이를 위해 휴가를 내는 직원을 못마땅해하며, '고작 그런 이유로 휴가를 내냐'라고 험담을 했다. 


두 번째로는 서로에게 불친절(?)한 것은 마이너리티의 공통점으로 보인다.  

메이저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살아야 하는 마이너들은, 그 마이너의 특징이 눈에 띌수록 서로에게 더 비판적이거나 거리룰 두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학연이나 지연 등 눈에 보이지 않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마이너 집단은 끈끈하게 붙어있어도 알아채기 힘든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성별, 인종 등 눈에 띄는 마이너들은 집단을 형성하는 게 오히려 메이저 집단에서 살아남기 불리해질 수 있으므로 서로 거리를 두는 경우들이 많다. 해외에서 사는 한국사람이 여전히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오히려 외국인보다 한국문화에 대해 (건전한 수준을 넘어서는) 심한 비판을 하는 경우의 일부도 여기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 번째로, 같은 집단이기에 필터링하지 않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한두 명의 여자가 같이 있는데도 남자들끼리 음담패설을 한다면 성희롱으로 고소당하기 딱 좋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다른 성별 사이에는 조심하게 되는 선이 있다면, 여자들끼리는 같은 선 안에 들어와 있어서 오히려 표현을 함부로 하는 경우도 있다. 여직원한테 남자 직원이 "치마가 너무 짧은 거 아냐?"라고 하면 문제가 커지지만, 다른 여직원이 그렇게 말하면 불쾌한 사건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직원에게 "이따위로 하니까 여자가 욕먹는 거야"라고 남자 상사는 말할 수 없다. 당장 성차별 발언으로 난리가 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여자 상사의 "이따위로 하니까 여자가 욕먹는 거야"라는 재수 없는 지적은 성차별 발언이 아니라, 여성공동체를 걱정하는 질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살아보니 여자의 적은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더라. 물론 여자끼리 치고박는 경우 눈에 더 잘 띄니까,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여자든, 남자들, 모든 사람의 적은 "요즘 애들은~", "여자/남자는~", "한국인들은~"처럼 혼자 고고하고 다 맞는 것처럼 남들을 가르치려 드는 예의 없고 개념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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