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31
전철을 탈 때는 괜찮은데 버스에서 유독 멀미가 심한 편이다. 괜찮겠지, 방심하고 슬쩍 뉴스 나 메시지를 읽으면 알람이 울리듯 곧바로 속이 메스꺼워진다. 매일 왕복 한 시간 넘게 버스를 타야 하는 내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애써 겉잠에 들거나 무언가를 들으며 멀미를 이겨내는 것.
오늘 아침에도 버스를 기다리며 유튜브 뮤직을 켰다. 요즘 매일같이 듣는 해리 스타일스의 ‘Love on tour’ 플레이리스트가 첫 화면에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는 올림픽 경기장의 광경이 떠올랐다. 열흘 전 나도 그 현장에 있었다. 들뜬 얼굴들에 섞여 만끽한 두 시간.
작년에 나온 앨범을 열심히 듣긴 했지만, ‘찐팬’을 자처하기엔 낯부끄럽다. 커리어의 정점에 있는 팝스타가 내한한다는 것, 그리고 그 기회가 두 번 있는 일은 흔치 않다는 것을 이유로 예매 전쟁에 뛰어들었다. 어찌나 치열했던지 극적으로 예매에 성공한 오후, 내내 웃음이 새어 나오던 기억이 난다.
시간이 빠르기도 하지, 가사를 미처 다 외우지 못했는데 어느새 봄이 왔다. 오전까지 바쁘게 보냈던 터라 공연장에 들어와서까지도 영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다 첫 곡, <Music for a Sushi restaurant>의 음계가 흐른 순간 모든 게 또렷해졌다. Ba-baba! 가사와 함께 스크린에 나타난 해리. 입을 벌린 채 감격한 K와 눈이 마주쳤다, 나도 같은 표정이었다.
고가도로에 진입하며 다른 가수의 노래가 시작됐다. 알고리즘 덕인지 최근에 자주 들었던 <Posing in bondage>가 재생되고 있었다. 재패니즈 브렉퍼스트. 미셸 자우너의 『H마트에서 울다』를 통해 알게 된 곡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책도 출근길에서 들었었는데.
‘들었다’는 표현은 버스에서의 독서 한정이다. 책은 읽고 싶은데, 멀미는 지독하고, 그렇게 오디오북을 몇 번 구매하다가 작년부터는 리디북스 앱에 정착했다. 성우가 녹음한 오디오북이 아니라 전자책의 글자를 그대로 읽는 기능인데, 어색하면서도 일관된 억양이 은근히 매력적이다. 무미건조한 목소리 덕에 오히려 주체적 감상의 여지가 생긴다고나 할까.
아무튼 『H마트에서 울다』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미리 책 소개를 보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는데도 이런 이야기에는 당할 방법이 없다. 점점 야위어 가는 가족을 바라보는 일, 후회할 줄 알면서도 잘못을 반복하는 순간들. 책 속의 일화들이 촉매가 되어 내 과거가 속수무책으로 소환되기도 했다. 덜컹거리는 출근 버스에서 눈을 감으면, 그때 그 엉망으로 환했던 날들이 그려졌다.
내려야 할 정류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노래에 맞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멀미 없이 금방 도착했다. 오늘은 출발이 좋네. 말하고 보니 정말 그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