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으로 마음을 입다 | EP.08
텅 빈 듯, 멈춘 듯, 다만 가만히
“오늘은 말 대신
숨을 한 칸 놓아두기로 했다.”
ㅡ
말보다 여백이 먼저 오는 날이 있다.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누가 물어도
대답은 짧았다.
“잘 모르겠어.”
그 말 뒤로
침묵이 한 겹 더 내려앉았다.
숨이 길어지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ㅡ
화이트는
비어 있음이 아니라,
모든 색의 소리를 잠시 거두어
빛을 머무르게 하는 표면이다.
생각도 감정도 말을 멈춘 자리.
연필은 뚜껑을 씌운 채,
노트는 펼쳐진 채,
나는 그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무엇도 쓰지 않은 페이지처럼.
지워서가 아니라
아직 쓰지 않기로 해서 남겨 둔
여백이었다.
ㅡ
책상 위 흰 종이 한 장.
커튼을 지난 햇빛 속에서
먼지 입자가 느리게 떠다닌다.
시계 초침이 멀리서만 들린다.
화면 밝기를 한 칸 낮추고,
머그 컵의 흔적이 남긴
연한 고리를 가만히 바라본다.
흰 셔츠,
흰 벽,
옅은 하늘.
색은 적었지만
모양은 또렷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오늘의 내가 잠시 녹아 있었다.
기억도 감정도
붙잡지 않은 채로,
나는 오늘을
얇게 한 장 넘겼다.
지우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릴 힘을 모으기 위해
비워 둔 자리다.
화이트는 무기력이 아니라
쉼표다.
어떤 감정이든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을 반쯤 열어 둔 마음.
아직은 쓰지 않고,
다시 쓸 수 있을 때까지...
조용히 밝아지는
한 페이지의 시간.
ㅡ
침묵보다 약간 작게.
한 음이 눕고 나면,
여백이 조금 더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