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나를 벗기는 일에 대하여

나를 이해하는 작은 기록 | EP.18

by 마리엘 로즈


깊어질수록 흔들리는 경계



깊어질수록

나는 가끔 두려워진다.


예전엔 몰랐다.

생각이 깊어진다는 게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과정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마음속을

한 겹, 두 겹 들여다볼수록

익숙하던 것들이 제자리에서 조금씩 어긋났다.


익숙한 표정, 습관, 말투까지

하나씩 의미를 잃어가고

마치 오래 입어 나를 감싸주던 옷이

어느 순간 헐거워지는 것처럼

작은 틈이 생겼다.


그 틈으로 바람이 스며들면

평소엔 들리지 않던 내 숨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제야 알았다.
‘깊어진다’는 말이
언제나 좋은 변화만을 말하는 건 아니란 걸.


어쩌면 그건
나를 둘러싼 가장 얇은 막이
가볍게 흔들리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덜어내는 깊이, 드러나는 존재



깊어진다는 건,
채우는 일이 아니라
천천히 덜어내는 일에 가까웠다.


생각을 덜고
욕심을 덜고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자존심까지
조금씩 내려놓는 과정.


그 과정이 너무 고요해서
오히려 더 아프기도 했다.

비워지는 동안
마음속 오래된 숨들이
작게 떨리며 빠져나갔다.

그러다 나는
내가 조금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익숙했던 나의 무게가 줄면
사람은 잠시 흔들린다.

하지만 무너진 자리 위로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숨 하나가 남았다.


오래 감춰뒀던 처음의 나 같은 것.

하이데거의 말처럼
“존재는 무(無)를 통과할 때 드러난다.”

겉의 내가 가라앉아야
비로소 속의 내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림자를 끌어안는 용기



이제는 조금 안다.

내가 두려워했던 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그동안 나를 버티게 만든 ‘겉의 나’가
부서지는 순간이었다는 걸.

껍질이 벗겨질 때마다
조금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상하게도 숨은 더 맑아졌다.


깊어진다는 건
결국 내 그림자를
돌아서지 않고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이제는

두려움이 와도

그대로 두려워하기로 했다.


억누르지 않고 숨기지 않고

내가 낸 숨을 내가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건 내가

진짜 나에게

조금 더 가까워졌다는

은근한 신호일 테니까.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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