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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강 언어는 나를 비춘다

by 김용석

우리는 종종 심리적으로 안전한 교실을 만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묻는다. 교육자와 학생 모두가 성숙해야 한다는 말은 맞지만, 사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완전하지 않다. 누구나 성장해야 하고, 누구나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불완전한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더 성숙한 단계로 이끌 수 있을까? 나는 그 답을 Satir 모형에서 찾는다. Satir가 제시한 대화와 이해의 방식이 교실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심리적 안전은 인위적으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도구다. 우리는 대화의 대부분을 언어에 의존한다. 그러나 언어는 단순한 전달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어떤 단어를 선택하고, 어떤 어조로 말하며, 언제 침묵하는지는 우리의 성격과 가치관, 그리고 삶에서 배운 경험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괜찮아요”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이 짧은 한마디는 정말로 문제가 없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감정을 숨기려는 신호일 수도 있고, 갈등을 피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으며, 그저 상대와 편하게 지내고 싶다는 소망일 수도 있다. 같은 언어가 전혀 다른 내면의 메시지를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상자라기보다 마음을 드러내는 창문이다. 우리는 그 창문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고, 타인을 이해한다.


언어가 사고를 형성한다는 사실은 여러 문화의 사례에서도 드러난다. 에스키모어에 눈을 가리키는 수많은 단어가 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우리에게는 단지 ‘눈’이지만, 그들에게는 갓 내린 눈, 바람에 날린 눈, 얼어붙은 눈이 각각 다른 실재다. 호주 북동부 원주민 언어인 구구 이미디르에서는 ‘왼쪽’이나 ‘오른쪽’ 대신 ‘북쪽’, ‘남쪽’ 같은 절대적 방향어만 쓴다. 그들은 항상 동서남북을 의식하며 살아간다. 또 호피족 언어에는 ‘과거·현재·미래’라는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사건의 흐름이다.


이처럼 언어는 단순히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세계를 구분하고 범주화하는 방식 그 자체다. 워프가 말했듯, 우리는 언어의 한계 안에서 사고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고가 언어를 확장하기도 한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에는 그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로운 경험은 새로운 언어를 낳는다. 또한 ‘그리움’ 같은 감정은 먼저 삶 속에서 경험된 뒤 언어로 형상화된다. 언어와 사고는 서로를 비추는 두 거울처럼 끝없이 순환하며, 우리의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결국 언어는 사고를 담는 그릇도, 사고가 단순히 언어에 반영된 결과물도 아니다. 언어와 사고는 서로를 끊임없이 빚어내며, 그 상호작용 속에서 사회와 개인의 세계관이 형성된다. 그러므로 언어를 탐구한다는 것은 곧 나를 탐구하는 일이고, 타인의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내면에 다가가는 일이다.


내가 어떤 말을 쓰는가는 내가 어떤 세계를 살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언어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며, 동시에 내가 타인과 관계 맺는 창문이다.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나를 이해하는 것이며, 타인과 공감하는 기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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