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
창밖으로 커피를 든 청년들이 뛰어서 건물로 들어가는 걸 보니, 비가 내리나 보다.
비소식이 있었나?
버스에서 우산을 든 사람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긴 했었다.
11시에 마친 공무원채용 건강검진 결과를 오후에 직접 받으러오라고 한다. 다시 집에 들어갔다 오기는 그렇고, 오후까지 무얼 할지 동선을 잡아본다.
공복에 잰 혈압은 105에 55로 낮았지만, 아침을 거른 탓이라고 하니, 급선무는 아침을 먹는 일이다. 브런치가 되겠다.
누군가 학동역 리나갤러리를 소개했던 기억이 나서 그곳에 가기로 정한다. 잠실역에서 한강 다리를 건너 건대입구역에서 7호선으로 바꿔 탄다. 학동역으로 달리는 전철에서 다시 보는 한강은 강폭이 훨씬 넓게 느껴진다.
아,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학동역 10번 출구에서 도보로 8분 거리의 리나갤러리를 찾아간다.
메인도로를 벗어나면 강남 특유의 마천루와는 다르게 작은 건물들이 아기자기하게 골목을 채우고 있고, 개성 있는 작은 카페들이 두 집 건너 하나라고 해도 될 만큼 많다. 일이 층은 대부분 사무실인 듯한데, 젊은이들의 왕래가 많아 보인다. 이곳에서 신선한 아이디어나 감성들이 솟아나는 건 아닐까.
약간의 언덕 위에 리나갤러리가 있다.
1층 전시작품은 대형 작품으로 몇 개 되지 않지만 2층의 소장품은 익숙한 작품도 있고, 값비싸 보인다. 무엇보다 작은 정원의 파릇한 풀들이 눈길을 끈다. 미술관 내부에서도 여전히 창밖의 정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윤선 작가의 이번 전시회 주제는 '비가현도( 秘可現圖 ) : 숨겨진 지도(Hidden Bearings)'다. '숨겨졌으나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지도'라는 뜻이란다. 관람객이 접하는 작품은 한국 전통 길상화에서 시작하였다고 작가는 밝힌다. 작가의 작품은 나무판대기에 홈을 만들고 색깔을 입혀 무형의 형태를 만드는데, 그 안에 산도 있고, 강도 보이고, 꽃도 피어나고, 뱀도 기어디니는 듯하다.
빗방울은 굵어졌고,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이 어두워졌다. 아직 두시도 안되었는데.
가방에는 우산은 없고 양산만 있다. 급하면야 우산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몇 번 그러다 보면 양산은 양산으로써의 기능을 잃고 말 것이다.
빗줄기가 굵어져 억수같이 내린다. 비를 핑계로 미술관 내부에 좀 더 머무른다. 다행히 관람자는 나 혼자다.
비에 젖고 있는 풀들은 나를 안심시킨다.
걸어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고, 판초를 뒤집어쓴 라이더들만 분주히 왔다 갔다 한다. 안내 데스크를 지키는 젊은 여인도 라이더가 가져다준 도시락으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전시실 중 한 곳은 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어서 회의 소집도 가능하고, 관람객들이 잠시 머물 수 있었다. 앉아서 바깥의 비를 감상하기에 더없이 좋다.
또 다른 여인이 커피와 물을 권하며 나의 머묾을 인지하고 용인한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건강검진 결과지도 받으러 가야 하고. 양산을 펼쳐 비를 피해야겠다. 강릉에도 지금 이 비가 흠뻑 내리고 있기를 바란다.
오늘도 다정한 하루였음에 감사한다.
2025. 9. 16. 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