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일기
90일간 비행기에서, 배에서, 사막에서, 호텔에서 그리고 다양한 집에서 숙식을 하다 보니,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공간은 어떤 곳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은 적응하는 존재이고, 주거공간이라는 게 개인이 처한 사정과 경제적 능력에 따라 결정되는 부분이 큰 만큼 이 의문은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다시, 질문을 바꿔본다.
사람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공간은 얼마만큼일까?
튀니지에서 시칠리아로 국경을 넘을 때, 우리는 GNV라는 회사의 페리를 이용했다. 밤새 우리를 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옮겨줄 이 배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하나의 객실에 이층으로 네 개의 침상이 놓여 있고, 비좁지만 화장실 안의 한 모서리를 이용해 삼각형의 샤워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다행히도 4인실에 우리 둘만 있어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면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사람에게 필요한 공간은 얼마만큼 일까?'
사실 나는 이 배안에서 꿀잠을 잤다. 근 반나절을 기다려 탑승하고, 무거운 케리어를 끌고 계단을 오르느라 진을 다 뺀 데다가, 파도가 요람처럼 배를 흔들어주니 눕자마자 잠이 들어버렸다. 침상은 딱 내가 누울 정도의 크기라서, 키 큰 사람은 어쩌나 싶을 정도로 작았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다. 동행인은 밤새 잠을 못 이루고, 12시에 출발한다던 배가 자동차와 화물을 싣느라 새벽 다섯 시가 되어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알려준다. 잠이 깨어 객실 창문의 커튼을 걷으니 밖은 일렁이는 물결뿐이다.
객실 중앙에 있는 로비로 나와보니, 객실이 좁아서 나온 사람들인지, 객실을 별도로 잡지 않은 사람들인지 다들 넓은 공간을 찾아 나와 있었다. 우리도 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로비에 머물렀다.
토주르의 사하라 사막에서는 천막 안 침구가 방의 전부였다. 대신 문밖의 사막이 전부 우리 집 앞마당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화장실이 거기 있었다. 천막과 떨어져 있어서 밤에 혼자 가기가 좀 무섭긴 하지만, 화장실 바닥은 전부 모레고, 등은 모두 태양열로 밝히고, 세면대에서 사용한 물은 다시 화장실 밖으로 연결되어 선인장을 키우고 있었다. 정화 장치가 마련되어 있는지 냄새도 없었다. 환경친화적인 최첨단의 화장실이 사막에 있었다. 사막에서는 멀리서 불을 밝히고 있는 화장실도 하나의 별처럼 반짝였다.
4인이 함께 숙소를 이용할 때, 화장실이 하나면 늘 순서를 정하거나, 들어가기 전에 더 급한 사람이 있는지, 들어가도 되는지 공고를 하고 사용했다. 간이 화장실이 별도로 있는 것도 괜찮은 경우다. 화장실이 바닥보다 더 높이 위치해 있는 경우, 샤워할 때마다 물이 바닥으로 넘쳐서 난감할 때도 있었다.
거실이 마음에 드는 경우, 나는 잠자리에 들 생각을 않고 밤늦게까지 그곳에 있었다. 창밖으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리는 숙소에서는 오래도록 식탁에 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넓은 정원의 사립문을 열고 나가 풀을 뜯는 말과 조우하고, 뜻밖에도 바닷가에서 새 주인의 조련을 받고 있는 낙타를 만나기도 했다.
90일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좋아하는 공간, 내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이 어떤 것인지 확인한 셈이다.
나의 집에 내가 좋아하는 그 모든 것을 가져다 놓을 수 없다면, 내가 그곳으로 가면 된다. 그것이 여행이 되지 않겠는가.
최소한의 공간에서 지낼 수는 있지만, 숨통을 틔울 별도의 공간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삶을 위해서는 자기 만의 공간도 필요하다. 그 어떤 공간도 자기 만의 공간으로 바꿀 수 있는 매직은 집중력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힘.
집중력이 흐려지면 길을 떠나야 한다. 그게 여행의 이유다.
2025. 5. 13 밤 강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