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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

여행일기

by 배심온

여행은 준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우리의 여행지가 영화의 배경이 되는 경우, 그 영화를 다시 찾아서 보느라 여행 전 한 두 달은 매일밤 잠이 부족했다.


영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중요한 장면을 촬영한 곳이 튀니지 토주르의 미데스 계곡과 옹크카멜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 그곳이 참 궁금했는데, 토주르를 간다고 하니 너무나 설레었다. 내가 사막을 가장 기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세 번 보았다.


지하마을 마트마타에는 "스타워즈" 세트장처럼 꾸며놓은 숙소도 있었다. 낙타의 목이라고 해석되는 옹크카멜로 가는 사막에는 실제 "스타워즈" 촬영장뿐만 아니라 "불의 제국" 세트장도 있었는데, 다른 행성과 접속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 들 만한 장소다.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흥미를 느낄 것 같다.


애니메이션 "루카"는 피사 근처의 테레가 배경이 된다. 루카는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바닷가 언덕 마을을 자전거로 내달리거나 물고기가 되어 퍼득인다.


영화 "그랑블루"는 시칠리아 타오르미나가 배경이 되는데, 여행 준비하면서 처음 접하였고, 나의 인생영화로 자리 잡는다.


시칠리아 시라쿠사에서는 "말레나"와 "글레디에이터"가 촬영되었다.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을 걸어 나오는 말레나는 남녀를 불문하고 누구라도 빠져들게 되는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시라쿠사 원형 경기장에서 막시무스와 결투를 벌이는 콤모두스 황제의 치졸함은 극에 달한다. 물론 역사적인 사실과는 많이 다르다고 한다.


"글레디에이터"에서 주인공이 죽는 순간, 억새를 손으로 스치는 장면은 사이플러스 나무가 사열하고 있는 토스카나의 어느 푸르른 벌판을 배경으로 한다. 로마에서 피렌체로 이동하면서 지나쳐간다.


팔레르모의 마시모 극장은 "대부 3"에서 알파치노가 딸을 잃고 그 충격으로 소리도 못 내고 울부짖던 바로 그 장소다.


톰 행크스가 출연하는 "천사와 악마"는 로마 시내의 온갖 성당들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찾아 나서게 만든다.


"시네마 천국"도 시칠리아 어느 시골 마을에서 촬영되었을 텐데 차를 렌트하지 않은 우리가 접근하기는 어렵다.


이탈리아 배우 소피아 로렌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해바라기"는 나폴리가 배경이 된다. 남자 주인공 안토니오는 밀라노 출신으로 결혼 이틀 만에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우크라이나와 소련으로 이동한다.

나는 카타니아 여행 중에 "해바라기" 영화와 관련된 영상을 보다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화 속에서 끝없이 펼쳐지던 해바라기들은 다름 아니라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죽은 수많은 병사들의 시체 위에서 피어났다는 사실이다.


남편의 전사 통보를 받은 지오반니가 남편 안토니오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곳이 바로 해바라기 밭이다. 전쟁 중에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하얗게 눈이 덮여있었다. 영화는 우여곡절 끝에 상봉하는 두 사람이 지오반니에게 아들이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다시 헤어지는 것으로 끝이 난다.


아들 이름도 안토니오다.


수많은 영화들이 세상 곳곳에서 촬영된다. "나는 보리"라는 독립영화는 주문진 바닷가 언덕 마을에서 촬영되었다.


새로운 도시 라구사에 왔다. 여기도 영화 촬영지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한국에서는 계속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비극인지 희극인지.


2025. 3. 20. 밤 10: 30. 라구사 숙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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