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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meSpace Oct 08. 2021

싯다르타를 읽고

나는 아직은 해석하는 일을 즐기고 싶다.

밑줄 친 하늘색 글자에 이전에 썼던 글을 링크해두었으니 참고하여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수행자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아버지를 떠났고, 바라문을 떠났고, 친구 고빈다를 떠났고, 고향을 떠났다. 세속의 애욕과 애정을 뿌리친 그는 길을 걷다가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그 외로움은 너무나 사무치는 것이어서, 죽어있는 상태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곧 싯다르타는 견디어냈다. 그는 죽었다 살아 셈인데 어쩌면 실로 죽었다 깨어났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싯다르타는 설법 듣기를 거부했다. 대신 스스로 찾아 깨닫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는 강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곤 했다. 강물은 흐른다. 그래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 하지만 강은 제자리를 지키니, 여전히 강이다.

  싯다르타는 강물의 단일성을 체험했다. 강으로부터 세상의 단일성을 깨달았다. 그는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과거의 싯다르타, 현재의 싯다르타, 미래의 싯다르타는 한 번에 존재한다. 어린 같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단일성을 파악할 수 없고, 일면만 볼뿐이다.


  그의 말은 상상력을 주입해줘서 재미있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미 한 번 인용했지만, 기원전 500년에 살던 헤라클레이토스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강의 상류는 마르지 않는다. 계속 낙하한다.

  과학에 따르면, 한때 불멸의 신으로도 여겨지기도 했던 태양마저 진화를 거듭하다 소멸할 것이다. 그것 먼지 혹은 구름의 형태로 떠돌아다니다 새로운 천체를 형성할지,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를 만들지는 아무도 모다.

  사람은 죽어서 어떤 것이 된다.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가죽이 남고 뼈와 살이 남는다. 그것은 결국 썩어서 사라지는 것 같지만 분명 존재한다. 산산이 조각이 나서, 공기 중에 떠다니거나 토양을 구성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산산조각이 난 그 어떤 것은 다른 사람의 체를 운행하는 기관이 될지도 모른다. 과학에는 이런 과정을 설명하는 보존법칙이 정리되어 있다.


  이전에 발행했던 에서 간의 연속성에 대한 의문을 기한 적이 있다. 우리는 무언가 변하는 것을 지각함으로써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만, 그 '변화'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정적이라고 생각했던 우주도 변하고 있고,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수많은 공기 입자들이 돌하고 있으며 책상 위에 가만히 놓여있는 것처럼 보이는 컵조차 미시적 관점에서는 한없이 요동치고 있다. 이 '변화'라는 것은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변화가 시간이라는 허상을 만들어낸 걸까.

어쩌면 변화마저 허상이 아닐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 모두를 ''라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게 들린다. 지금까지 손톱을 몇 번을 잘랐으며, 머리카락을 얼마나 잘랐으며, 피부가 몇 번이나 벗겨졌으며, 얼마나 많은 세포가 죽고 생성까. 얼마나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환경을 살아왔을까. 찌 되었든 나는 나다. 과거의, 현재의, 미래의 나를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하는 것 무의미해 보인다. 정말 변화란, 시간이란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 각각의 진리가 담긴 삼라만상이 그저 하나로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싯다르타는 강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 나는 강을 떠올리며 해석했다. 그중 완전히 유물론적인 생각을 글로 적어냈다. 해석한 글을 썼지, 깨달음의 내용을 쓰지는 않았다. 사실, 깨닫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다. 정말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 내용을 글로 적지 않을 것 같다. 지금은 그저 글을 쓰고 싶어서, 하찮은 지식을 뽐내고 싶어서, 내 존재를 알리고 싶어서, 내 속내를 드러내고 싶어서 의견 충돌과 비난을 감수할 생각으로 애써 글을 남발하고 있다. 나는 아직 해석하는 일을 즐기고 싶다.

  싯다르타를 읽으며 쇼펜하우어가,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가 떠올랐다. 나는 아직 그 사람들의 이름만 아는 정도일 뿐이다. 또한 불교의 사상 중 물리학적 해석과 응용할 법한 내용들을 발견했다. 열역학, 양자역학이 핵심 적용 대상이다. 이들을 엮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다시 책의 내용으로 돌아온다. 다르타는 세상의 단일성을 깨달았다. 속세의 어린 사람은 진리의 일면만을 본다. 서로 다른 일면의 체험은 서로 다른 언어의 형태로 발현되며 대립이 생긴다. 쟁과 불안이 생긴다. 번뇌 생긴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그의 깨달음을 말할 수 없다. 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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