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려도 돼, 다만

by 변한다


“ 내 인플레이션 예측은 틀렸다.” 뉴욕타임스에 한 저명학자의 기고문이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2008년 노벨경제학상까지 받은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자신의 주장이 틀렸다고 대대적으로 공언을 한 것이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지만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뉴욕타임스의 훈훈한 평까지 참 우리나라에서 영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었습니다. 사실샘까지 났습니다.


신문 지면을 넘기다 보면 ‘바로잡습니다’라는 제목으로 지난 기사에서 보도를 잘못한 사실들을 바르게 고쳐놓은 걸 왕왕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정정보도청구권 즉 미디어의 사실적 보도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때 당해 미디어에 대해 그 잘못을 정정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통해 되는 경우입니다. 내 경우 왠만하면 그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합니다. 서로 얼굴 붉히고 일하다 보면 다음을 마냥 쿨하게 기약할 수 없으니까 말이죠.


허나 경력이 상당한 몇몇 기자분들의 경우 끝내 본인의 오류를 받아들이기 무척 힘들어합니다. 토씨 하나도 바꾸기 극렬히 거부하며 편집국 등 갖은 핑계를 대기에 사실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이는 비단 자존심만의 문제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디서 봤는데, 전문가들은 오류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드러나면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고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냥 결국 전문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실을 바탕으로 기사를 정확하게 써야 하는 기자의 기본적 소양이 어쩌면 없을 수도 있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 단숨에 거르고 단념하는 게 빠를 수도 있습니다.


고미야 가즈요시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문제해결력>에선 문제해결을 방해하는 커다란 바보의 벽을 깨기 위해선 세 가지 키워드를 보라 했습니다. 왜? 정말? 그래서? 요즘 내가 수시로 자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괄호에 우리 자신을 넣어도 되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넣어도 질문이 됩니다.


( )을 위해 왜 그걸 해야 하지?

정말 그걸 해서 ( )에게 어떤 효과가 있지?

그래서 그 다음 ( )은?


이렇게 묻다보면, 바보로 가는 방향에서 상당히 빗겨나게 됩니다. 즉 잘못이나 오류를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빨리 정정하고픈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괴테도 인정했습니다. 우리가 만약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았다면 우리는 숨어버렸을 거라고. 온전한 정신이라면 오류나 잘못을 태연하게 드러내놓고 배쨀 수가 없는 겁니다. 긴말 할 것 없이 나로 돌아와 일부 기자들 탓하지 말고 나부터 모르는 것엔 자동으로 벌어지는 입을 닫고 배움의 자세, 무엇보다 모름을 인정하고 틀림의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지니자고 다짐합니다. 깨달음에는 귀를 열고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변화나 혁신은 고사하고 뱉은 말 주워담기와 표리부동하지 않음이 얼마나 어렵고 코앞조차 보이지 않은 안개 속을 휘휘 수십번 수백번 휘저어야 겨우 닿는 안간힘의 결정체가 바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사실 너무나도 잘 알지 않는가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는 인간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굴복하든지 아니면 그것에 맞서 싸우든지 양단간에 스스로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자포자기해 꺾이든 전투력이 넘쳐 부러뜨리든 이는 인간이란 주체로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며 그 해석은 각자의 몫.



화룡점정으로 <국가부도의 날>에서 김혜수의 내레이션을 보태봅니다.


“위기는 반복돼요. 위기에 또 당하지 않기 위해선 있지 말아야 해요. 끊임없이 의심하고 사고하는 것,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것.그리고 항상 깨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 저는 두번은 지고 싶지 않거든요.”


중요한 건 우리 스스로와의 관계를 더 좋게 하기 위해, 솔직하게 각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두 눈 부릅뜨고 치열하게 다투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좀 더 전투적으로 글쓰기와 씨름해보자고요. 더 강렬하게, 더 집요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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