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조에 당한 글쓰기

by 변한다

오전 내내 마음을 졸였습니다. 지난 여름에 마친 사회복지실습 일지를 포함한 전체 서류에 대한 pass 여부를 알려준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왜냐면 나는 지난 추석 전에 일체의 서류를 교수의 사무실로 안전하게 배송했는데 한 달이 넘게 아무 연락이 없다가 이제야 데드라인 4일을 남겨두고 가타부타를 통보하는 자체에 무례함과 불쾌함까지 느껴서요. 아차차 그 놈의 곤조에 당했습니다.


이건 뭐 데자뷰일까요. 문득 생각나는, 석사학위도 참 어렵게 땄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박사과정을 하지 않고 바로 취직했던 내가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교수님은 내 석사논문에 바로 오케이를 하지 않으셨기에 졸업이 아닌 수료로 입사하는 비운까지 과감하게 선사하셨습니다. 퇴근 후 엉덩이에 난 종기를 참아가며, 가까스로 쓴 논문 체크를 지방 근무로 인해 평일에 직접 학교에 오기 어려웠던 나 대신 받으러 가신 나의 어머니를 상당 시간 기다리게 하셨고, 차가운 태도로 무안을 주기도 하셨던 담당 교수님...엄마는 그 날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에구구 그 놈의 곤조에 당했습니다.


국어사전에서 곤조를 찾아보니 근성의 비표준어라고 나오더군요. 어라? 근성은 grit이고, 내 특징이기도 한데, 보통 근성은 질긴 정신력을 말하지만 그게 지나치면 전혀 개선이 되지 않는 일방향적인 불통, 고집으로 인식되기 마련입니다. 오죽하면 속된 말로 곤조를 부립니다. 즉 '더러운 성질을 부린다‘로도 쓰이지 않는가요. 그러고 보니 내가 뭐 우당탕탕 곤조 맛집인지요. 남들은 참 쉽게도 가는 길에 결정적인 순간들 때마다 실습일지, 논문 등 내 글쓰기에 이놈의 곤조들을 맞닥들이고 거절당하며 또 심쿵하는 나에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오늘도 어김없이 생각했습니다.


지난 연휴 때 본 이시형의 <신인류가 몰려온다>에서 90세의 저자는 살아보니 중년의 터닝포인트를 ‘나’보단 타인지향이라고 하더군요. 속으로 빙고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타인이 도움을 요할 때는 등을 살짝 미는 정도로만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캬 나이 들었다고 해서 조언도 훈수도 둘 필요도 없는 겁니다. 얼마 전에 본 짤, 개그우먼 박미선이 후배 장도연한테 조언할 필요가 전혀 없다면서 너나 나나 다 같은 프로, 즉 돈 받고 일하는 경쟁자들인데 너한테 무슨 조언을 하느냐며, 알아서 잘하라고 했습니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렇게 일하면 된다고 했죠. 무릎을 쳤습니다.


내가 참 좋아하는 사자성어,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란 의미의 수처작주, 교수든 사장이든 장관이든 현재 위치에서 수처작주 하더라도 그 옷을 벗게 되면 진짜 자기 자신이라는 본질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게 본질적인 위엄이고 힘이고 진짜 수처작주란 겁니다. 그 진실된 에너지로 나는야 어디에 있든 그 무엇이 되든 변치 않는 마음으로 곤조 말고 ‘공조’로 평생 수처작주 하고 싶을 뿐...


어차피 곤조맛집 내가 천상 약자니 더럽고 치사해도 결국 내가 숙이고 원하는 바를 얻어야 하지 않나요. 3시부터 6시까지 하루에 단 3시간만 통화가 된다는 그 바쁘신 교수 양반께 2시 59분에서 3시로 가리키는 시계 큰바늘을 확인한 찰나 냅다 통화를 시도했습니다. 에미상 급 세상 탁월한 연기로 수정할 것을 최대한 공손히 여쭙고, 당장 고쳐서 출력해 택배로 신속하게 보내겠다고 말씀드린 후 마음에도 없는 '감사' 를 침도 바르지 않은 아주 마른 입으로 수차례 올렸습니다. 역시 사회생활 19년 짬이란 허헛~ 결코 헛살지 않았더군요. 그러고 보니 뭐 곤조에 한 두 번 당했어야지 말이지요. 흠 곤조 말고 공조로 평생 수처작주를 꿈꾸는 글쓴이가 참아야지 별 수 있겠는가. 하고 자위해야 그나마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밤이 찾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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