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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에 내걸 글귀는?

나이 일흔에 풀어놓는 소소한 이야기(제27편)

* 인천공항에 내걸 글귀는? *



어제 ‘Daum’을 열었더니 제자에게서 메일이 와 있었다. 메일 보내고 난 뒤에 문자를 보내줬더라면 덧붙였더라면 금방 열어보았을 텐데 날짜를 보니 일주일이 지난 셈이다. 첨부파일을 열어 읽어 내려가니 한 달 전쯤 그리스 여행을 다녀온 뒤 적은 일종의 기행문이었다. 아마도 내가 국어교사니 한 번 봐 달라는 뜻도 담겼으리라.

그리스, 18년 전쯤 다녀온 곳이라 기억을 더듬어보니 제자도 나랑 비슷한 곳을 다녀온 모양이다. 하기야 패키지여행이라면 세월이 좀 지났다 해도 다를 게 있을까. 자연경관을 보러 감이 아닌 문화유적지라면 변화가 없을 테고. 비록 세련된 글은 아니었으나 이국 여행의 기분을 잘 드러내고 있어 읽으면서 문득 내가 예전에 써놓은 글을 다시 보게 되었다.


(파르테논 신전 기둥)


‘그리스!’

이제는 외국에 나간 경험이 좀 되어선지 여행지마다 갔다 와 곧 잊히는 곳과, 갈수록 다시 가고픈 마음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곳도 생겨났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는 잊을 수 없는 곳이다. 돌아다닌 기간은 총 9박 10일간의 일정에서 고작 사흘뿐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것을 보았다. 아니 많이 느꼈다고 해야 하리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은 바로 그리스 문화에 대한 그 나라 사람들의 자부심이었다. 하기야 조상 덕으로 먹고사는 대표적인 나라니 그럴 만도 하리라. 남의 나라를 여행할 때 사람들은 그 나라의 첫인상을 어디서 받을까. 사람에 따라, 또 나라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스에서는 ‘아테네 공항’에서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수속을 밟고 회전문을 열고 나오려는데 비행 상황을 알려주는 안내판 옆에 기다랗게 내려뜨린 천(현수막)에 적힌 한 맥주회사 광고 문구가 눈에 띄었다.

“Greece has exported 51,807 words to the world and kept one for itself : Mythos.”

상표가 ‘Mythos’란 맥주 선전이었는데 해석이 그리 어렵지 않은 짧은 글귀가 그만 눈에 콱 들어와 박혔다.

“그리스는 전 세계에 51,807개의 단어를 전파했고~”라는 구절은 어떻게 보면 평범한 말 같은 데도 이렇게 뇌리에 박혀버린 건 아무래도 내가 국어교사이기 때문이리라.


(당시 아테네 공항에서 보고 찍은 광고)



나는 국어사전을 펼칠 때마다 좀 서글픔을 느낀다. 불행하게도 사전에 실린 단어의 반 가까이 한자어이기에. 이는 역사적으로 중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에서 생긴 현상이지만 그래도 서글프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영어 역시 60% 이상이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어원을 갖는다는 게 서글픔을 덜어주진 않는다. 영어의 주인은 누군지 모르나 한글의 주인은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

자음과 모음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알파벳(alphabet)’이 그리스 문자의 첫 두 글자인 '알파(Alpha)'와 '베타(Beta)'를 합하여 만든 글자다. 뿐인가, 그리스어 첫 글자는 α(Alpha)요, 끝 글자는 Ω(Omega)인데, 지금도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라 말할 때 ‘알파에서 오메가까지’란 관용어를 사용하곤 한다.


(고대 그리스 문자 - 알파벳)



그리고 내 직업과 관계있으며, 국민의 대부분이 학부형 아니면 학생이니만큼 ‘학교’의 어원이 궁금하리라. 이도 그리스어 ‘schole(여가)’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그냥 넘길 수 없다. 또한 이집트가 자랑하는 ‘피라미드’도 그리스어 ‘피라미스(pyramis)’에서 왔으며(이집트인들은 ‘메르’라 부름), 가을 들길에 지천으로 피는 ‘코스모스’도 그리스어 ‘코스모스(kosm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질서' 혹은 '조화'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우주’를 뜻하기도 하고.


혹 화학을 배운 경험이 있는 이라면 ‘1, 2, 3, 4, 5 ~ ~ ~ ~ 10’에 해당하는 ‘모노(mono), 디(di), 트리(tri), 테트라(tetra), 펜타(penta) ~ ~ ~ ~ 데카(deca)’를 기억하리라. 이것들은 이미 ‘모노’가 ‘모노드라마(monodrama : 1인극)’로, ‘트리’가 ‘트라이앵글(triangle : 3각형의 악기)’로, ‘펜타’가 ‘펜타곤(Pentagon : 5각형의 미국 국방성 건물)’으로,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Decameron : 10일간의 이야기)’에서 데카’가 ‘10’이란 숫자로 쓰이고 있음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그리스 숫자를 접두어로 활용한 예)



그리스에서 본 문화유적은 시간이 감에 차츰차츰 잊혀 가는데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한 건 공항에서 본 맥주 선전 광고 문구다. 달리 말하면 거기서 느낀 그리스인들의 자기 나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다. 혹 그리스 여행을 해 본 이라면 느꼈을지 모르지만, 그리스인들은 자기 나라 문화를 다른 외국인에게 ‘제발 와서 봐 주십시오.’ 하고 권하기보다는 ‘보고 싶으면 와서 보시오.’ 하는 형태다.

어떻게 보면 도도하기까지 한 이런 면은 그리스인들의 자기 문화에 대한 자부심에서 나왔다고 본다. 적어도 문화면에서 우리를 넘어설 나라가 어디 있느냐는. 다소 건방져 보이는 이런 자세가 오히려 밉지 않게 보이는 건 웬일일까?


(아테네 공항 광고를 보고 만든 글귀)



문득 인천공항을 생각한다. 많은 나라를 가보진 않았지만 외형 면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세계 공항 순위에서도 3위 이내를 쭉 고수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맨 처음 찾는 외국인들에게 우리 고유의 뭔가를 보여주는 데는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들을 확 끌어당길 수 있는 무엇이 없을까? ‘K-pop, K-drama를 비롯한 한류, 김치, 경제성장, IT강국...’ 이렇게 나열해 나가다 문득 이만열이란 한국 이름을 지닌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전 경희대 교수(2011-2017년)가 한 말이 생각난다.

“한국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문화적 요소들이다”

문화적 요소 가운데 으뜸은 글자 아닌가. 한글이란 위대한 문자를 가진 나라가 아닌가. 그걸 인천공항에 들어오는 외국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 이 글은 '목우씨의 일기장(2019년 8월 29일)'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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