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편 : 풍요(風謠)
♤ 향가 이야기 ♤
- 제14편 「풍요(風謠)」 -
향가 가운데 민요로 인정받는 노래로 「서동요(薯童謠)」와 「풍요(風謠)」가 있습니다. 뒤에 ‘요(謠)’가 붙는다는 공통점에다 둘 다 4구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선덕여왕 시절 '양지 스님'이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들 때 지역 백성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풍요」를 소개합니다. 그럼 배경설화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양지(良志) 스님의 조상이나 고향은 알 수 없고, 오직 그 행적이 선덕왕 때에 한 가지 일로 드러나 있다. 지팡이 끝에 베주머니를 걸어 놓으면 그것이 저절로 날아가 보시하는 집에 가서 흔들어 소리를 내며, 그 집에서 알고 공양미를 넣어서 자루가 차면 석장이 날아서 절로 돌아왔으므로 석장사(錫杖寺)라 하였다 한다.
또한 문장이 능숙하여 영묘사 장륙존상을 만들 때 온 마음을 모아 망상을 잊는 경지로 빚자 지역의 백성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하면서 이 노래를 불렀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 하는 일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니 이 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노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다”
읽어보셔서 아시겠지만 해독(解讀) 면에서 학자들 사이에 가장 이견(異見)이 적은 노래입니다.
“온다 온다 온다 (사람들이 많이 오기도 오는구나). / (아직 공덕을 쌓지 못했으니까) 오는 사람들 다 서럽다. / (공덕 쌓지 못한) 우리들 서럽고도 서럽다. / (그래 열심히 불공 드려) 공덕을 닦자.”
이 노래는 영묘사의 장륙존상을 만들 때 성(城) 안의 남녀들이 부른 노래로, 현재 전하는 민요의 전형적인 형태입니다. 특히 “오다 오다 오다 오다” 하고 이어지는 앞부분은 일하러 오는 사람들의 긴 열을 떠올리게 합니다.
민요의 작자를 알 수 없듯이 「풍요」 역시 양지 스님의 이야기에 함께 실려 있지만 지은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는 노래입니다. 단지 양지 스님이 불상을 만들 때 그 스님의 불심에 감동한 사람들이 달려와 도와주며 부른 노래라는 사실만 언급돼 있을 뿐.
흙을 나르며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 이 노래의 성격은 민요 가운데서도 '노동요'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모내기노래'와 같은 류의 노래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공덕’ ‘서럽다’ ‘오다’라는 이 세 시어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불교 전파를 위한 포교의 노래이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현세의 삶은 고됩니다. 그래서 서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믿음이 약할 때는 더욱 그렇지요. 그럴 때 이런 노래를 부르면 어느 정도 그 괴로움을 덜 수 있다는 믿음을 상기시켜 줄 겁니다.
이 노래의 이름으로 풍요가 대표적이지만 ‘양지사석가(良志使錫歌’)니 ‘바람결노래’니 ‘오라노래’니 하는 이름도 쓰입니다.
또한 작자에 대한 견해는 양지 스님이다는 견해, 장육존상을 만들 때 진흙을 운반한 일꾼 중 하나가 전래의 방아노래를 개작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 선덕왕 이전부터 사찰로 향하는 군중들 사이에 불린 향찬(鄕讚 : 불교 찬양가)이 사찰 내의 공사를 수행할 때 노동요로 불려진 불교적 민요로 보는 견해, 신라 통일신라 이전에 노역에 동원된 피지배민(하층인민)들 입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불리어진 민요로 보는 견해 등이 있습니다.
끝으로 김문배 김인배 형제가 「풍요」를 이전과는 아주 달리 새롭게 해석한 글을 덧붙입니다.
“보리라 보리라 보리라
보리라 불상을 돌아보더라
불상을 돌아보더니 일 끊어질 보름날
다 꾸며질 절 일으킴을 보리라"
*. 첫째 사진은 향가 '풍요'의 현장인 영묘사터인데, 신라 최초의 공인 사찰인 흥륜사의 터로 여겨지기도 해서 지금은 흥륜사라는 현대식 절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둘째는 흥륜사에서 발견된 ‘얼굴모양수막새’인데,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