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학년인지는 기억 안 나나 초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읽은 네덜란드 시골 어린이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네덜란드는 아시다시피 바다가 육지보다 높은 지역이 꽤 됩니다. 그러니 그곳엔 바닷물이 넘쳐오지 않도록 방둑을 쌓아야 합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그 어린이가 학교 오가는 길에 방둑이 있었고, 날마다 그 아래를 지나야 했습니다. 제법 쌀쌀한 어느 날, 방둑 아래를 지나고 있는데 바닥에 물이 흥건하여 웬일인가 하여 고개 들어 방둑을 보니 아주 작은 구멍이 나 있고 거기서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아마 철 모르는 아이라면 그냥 지나쳤거나 아니면 한참 걸어 마을에 가 사람들에게 알렸겠지요. 헌데 그 어린이는 순간 그대로 두면 구멍이 커질 테고, 댐이 무너지고, 그러면 마을이 물에 잠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외쳐 봐야 사람은 오지 않고 주위를 둘러봐도 막을 만한 적당한 도구가 보이지 않아 우선 자기 주먹을 넣어보았습니다. 마침 구멍 크기와 주먹 크기가 딱 맞아 물이 새 나오지 않았습니다. 일단 위기를 모면하면서 언제 올지 모를 구조자를 기다리며 버텼습니다.
팔이 저리고 온몸에 피로가 몰려와 주먹을 빼고 싶지만 다음에 이어질 큰 위험을 생각하고 억지로 버텼습니다. 해가 저물고 어둠이 몰려오면서 기온은 내려가 추웠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마을이 물에 잠긴단 마음에 계속 주먹을 끼운 채 버텼습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아이, 소년의 몸이 한계에 이르러 정신줄을 놓을 즈음 멀리서 들려오는 엄마 아빠 부르는 소리에 겨우 대답을 하곤 기절해 버렸습니다. 그날따라 엄마 아빠가 하필 장에 갔다 늦게 오는 바람에 소년의 고통은 길어졌지만, 걔의 살신성인 때문에 마을은 물에 잠기는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60년 다 된(혹은 지난) 이야기라 기억이 엉터리일까 봐 인터넷 뒤져봤더니 다행히 비슷했습니다. 다만 실화가 아닌 동화라는 설도 있더군요. 실화든 동화든 그 얘기가 주는 교훈은 ‘물 흐르는 곳에 구멍이 나선 절대 안 된다.’입니다. 그렇지요, 구멍 나면 물이 새고 시간 갈수록 점점 더 커지니까요.
(네덜란드에 있다는 동상 - 구글 이미지에서)
봄이 되면 텃밭 농사 지음에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 땅 고르기입니다. 이를 시골에선 다들 ‘로타리 친다’고 합니다. 땅 고르는 농기구 트랙터 뒤에 달린 작업도구의 하나가 로타리(정확한 명칭은 '로타베이터')인데, 이는 흙을 잘게 부수고 골고루 펴는 역할을 해 만들어진 말입니다. 우리 집 밭이 올해부터 좀 늘어나 삽질로는 너무 넓은 것 같아 걱정하던 차 어떻게 알았는지 아랫집 할머니 아들이 트랙터를 몰고 왔습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다음 아들까지도 다 참 착하신 분들입니다. 아마 이런 분들이 많으면 살고 싶은 세상이 되련만.
문제는 트랙터를 후진하다가 마당에 설치된 부동급수전(不凍給水栓 : 겨울에 얼지 않도록 설치된 수도)을 부러뜨렸습니다. 부동전('부동급수전'을 줄인 말)은 오직 주택에서 바깥 물 쓸 때 꼭 필요한 수도전입니다. 예전에는 이게 없어 얼어터지는 경우 많았지만 부동전의 개발로 한겨울에도 동파 없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아드님은 미안해했지만 밭 갈기에 비하면 부동전이야 적은 돈으로 사 혼자 끼우면 됩니다. 이제 그 정돈 넉넉히 갈아 끼울 짬밥이 되니까요. 할머니 아들이 텃밭을 예쁘게 갈아주고 간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저 일을 혼자 삽질했더라면... 아찔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마운지요.
(트랙터 뒤에 다는 로타리<로타베이터>)
(로타리 친 밭 - 구글 이미지에서)
내친김에 철물점에 가 부동전을 사 와 설치를 했습니다. 저는 웬만한 일은 다 따라 하지만 완벽하게 하는덴 부족합니다. 그래서 부동전에 엑셀파이프를 연결하고 난 뒤 흙으로 덮기 전에 잠시 둬 보았습니다. 혹시 물 새면 다시 끼우든지 고수 불러야 하니까요. 그런데 역시... 물이 조금씩 새는 게 아닌가요. ‘아, 나는 역시 안 돼!’ 또 한 번 제 기술력이 형편없다고 여기며 이웃에 사는 고수를 불렀습니다. 그가 보더니, “여기 작은 구멍이 나 물이 새 나오는군요.” 하는 말에 보니 정말 부동전 파이프에 바늘구멍만큼 작은 구멍이 하나 나 있지 않은가요.
‘이런, 불량품을 팔다니!’ 속으로 화가 나 다시 철물점으로 갔습니다. 공장에서 만들어내면서 나온 불량품으로 여겼으니까요. 그런데 제 얘기를 듣던 주인이 껄껄 웃더니, “아이구 아저씨요, 저 구멍이 얼지 않게 만드는 비법 중의 비법인데...” 했습니다.
(왼쪽은 부동전 모습이며, 오른쪽은 부동전 맨 아래 뚫린 바늘구멍)
길게 이어진 얘기를 줄여 설명해 봅니다. 한겨울 바깥에 수도꼭지까지 물이 꽉 차 있으면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물이 얼고 그러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헌데 구멍이 뚫려 있어 물이 아주 조금씩 빠져 수도관이 텅 비게 되면 물이 없으니 얼지 않게 만든 원리였습니다. 즉 그 작은 바늘구멍 때문에 얼어 터지지 않는다는 점. 원래 어느 파이프든 물 새지 않기 위해 만들고 그 용도로 쓰지 않은가요. 그런데 물이 아주 조금씩 빠지게 하여 동파(凍破)를 막는 비법.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원리를 수도전에 활용하여 주택에서 한겨울에도 수도가 얼어터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물이 새지 않게 구멍을 막는 게 아니라 물이 흐르도록 구멍을 낸다? 알고 보면 별것 아니지만 처음 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참 대단하지 않은가요. 일종의 역발상이라 할까요, 다들 구멍을 막으려 애쓸 때 구멍을 뚫어 한겨울 주택의 수도 동파를 막게 만들었으니... 부동전 개발자가 처음 수도관에 구멍 낸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 반응은 어땠을까요? 아마 다들 '미쳤나!'였을 겁니다. 수도관에 구멍 낸다는 발상은 할 엄두를 못 냈을 테니까요. 한 천재의 발상으로 주택에선 겨울에도 얼어 터지지 않는 수도관을 갖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