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위에 내리는 비 Mar 19. 2023

제103화 : 떨어지지 않는 '까치밥'

@. 오늘 글은 한 달 전에 쓴 일기에서 뽑아왔습니다



     * 떨어지지 않는 ‘까치밥’ *


  몇 년 전 겨울, 아는 이가 가게를 개업해 축하 선물로 실내에서 키울 화초를 사러 꽃집을 찾았습니다. 원하는 화초가 담긴 화분을 고른 뒤 잠시 짬이 나 둘러보았습니다. 그때 꽃꽂이 작품이 제 눈에 띄었습니다. 아주 멋진 작품 구성에서 특히 빨간 열매가 눈에 띄어 보았더니, 세상에! 망개나무 열매가 아니겠습니까.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망개나무는 예전에 ‘망개떡’을 만들었던 백합과에 속하는 '청미래덩굴'을 가리킵니다)

  저는 조화 - 아니 만든 열매니까 조실(造實)이라 해야겠지만 -라 여겼습니다. 한겨울에 망개 열매가 자연 상태에서 달려있을 리 없을 테니까요. 허나 꽃집 주인의 말은 꽃꽂이 작품 만들려다 뭔가 이색적인 게 들어가면 더 낫겠다 싶어 산을 뒤지다 눈에 띄어 따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사실 긴가민가하였습니다. 제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었으니까요. 헌데 지금은 믿습니다. 오가며 가끔 보고 있으니까요.  마을 한 바퀴 돌다 보면 산 쪽으로 올라갈 때가 종종입니다. 그러다 보면 망개 열매뿐 아니라 찔레 열매도 만납니다.

  둘의 공통점은 빨갛다는 점과 겨울에도 떨어지지 않고 덩굴 가지에 붙어있다는 점입니다.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 있는 둘의 차이점을 굳이 찾자면 망개 열매보다 찔레 열매가 더 자주 눈에 띄는 편이라 할까요.
  오늘 두 나무의 덩굴에 달린 열매를 얘기하려는 까닭은 이미 떨어져야 할 열매가 아직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맘때까지 떨어지지 않는 찔레 열매는 봄이 되어도 떨어지지 않다가 비를 여러 번 맞으면 누렇게 썩으면서 떨어져 나갑니다. 이렇게 한겨울 눈 속에도 떨어지지 않는 찔레나무 열매를 시골 사람들은 ‘까치밥’이라고도 부릅니다.
  까치밥, 이 말을 들으면 감나무에서 감을 따다 까치 먹도록 나뭇가지에 몇 개 남겨둔 '감'을 가리키는 말로 알고 계실 겁니다. 물론 그것도 까치밥이지만 한겨울에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는 빠알간 '찔레 열매'도 까치밥입니다.

  그러니까 감나무의 까치밥은 사람의 배려가 담겼다면, 찔레의 까치밥은 자연의 배려가 담겼다고 봐야지요. 사실 찔레나무의 까치밥을 까치가 먹는 걸 본 적 없습니다만 이런 이름 붙임에는 그 나름의 까닭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눈 속 망개나무 열매)



  그런데 찔레 열매가 까치의 밥이 돼 주기 위해 떨어지지 않고 있다 까치 날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이 정말 맞을까요? 찔레 열매는 까치가 날아들어 먹기엔 썩 좋지 않은 먹잇감입니다. 아시다시피 날카로운 가시가 돋았는 데다 특히 겨울엔 유독 가시가 거칠게 둘러쳐져 있습니다.
  거기로 덩치 큰 까치가 몸을 비집고 들어와 열매를 따먹는다? 한 번이라도 촘촘히 박힌 가시에 제대로 찔려본 적 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겁니다. 제 생각엔 단지 빛깔이 홍시처럼 빨간 데다가 눈 속에서도 뚜렷이 보여 새들의 먹잇감으로 좋겠다 싶어 그런 이름 붙이지 않았나 합니다.

  그럼 대부분 늦가을까진 떨어졌건만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는 까치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떨어지지 않은 그 부분에는 꽃이 피지도 않고 열매도 열리지 않습니다. 누렇게 뜬 상태로 생을 마감할 뿐.
  자신은 일찍 떨어진 동료들보다 오래도록 매달렸다는 호기는 부려볼 수 있겠지만 그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떨어지지 않았기에 식물에게 가장 소중한 종족 번식의 임무 저버린 꼴이 됩니다.


  주변을 보면 오래도록 한 자리를 차지해 그 자리 비켜주지 않고 끝까지 지키려 아등바등 살아가는 사람을 종종 봅니다. 자기만이 세상을 이끌어나갈 인재라 확신하는 양 한 자리에 못을 박아 그 자리 넘보는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사람도 봅니다.
  사실은 그 자리 비우면 다른 유능한 사람이 차지해 더 나은 결과 창출할 수도 있건만 자기 아니면 안 된다고 여기면서 말입니다. 덩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찔레 열매와 자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전에는 삭막하고 헐벗은 산속을 예쁘게 꾸미는 열매라 여겼건만, 요즘 찔레나무 열매를 볼 때마다 아쉬움과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낍니다. 그만큼 제가 나이 들었다는 뜻인지, 마음이 좁아졌다는 뜻인지... 생각이 많아지는 아침입니다.


(눈 속 찔레나무 열매)



  학창 시절 배운 조병화 시인의 시 「의자」 마지막 연을 인용해 끝을 맺습니다.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드리겠습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