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3주 전 쓴 일기에서 뽑았습니다.
* 죽어서 나무로 다시 태어날까? *
오래전에 나무의 덕(德)을 예찬한 글을 올린 적 있습니다. 그때 말미에 나 죽어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무로 환생하고 싶다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요즘 날마다 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땔감 마련입니다. 우리나라 어디든 야산에 오르면 땔감은 흔합니다. 날마다 땔감 마련한다고 하니 집안 모두 ‘나무 보일러’로 난방하는가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데 고작 4평짜리 방 하나입니다.
방 하나 데우는데 필요한 나무라야 사실 얼마 안 됩니다. 다만 제가 힘이 달려 이삼 일치 분량만 갖다 나르다 보니 잦은 일이 되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무 자르는 도구도 문제가 되군요. ‘기계톱’이 고장 나 ‘손톱’으로 자르다 보니 그 양이 아주 적으니까요. 기계톱 사면 안 되느냐 하시겠지만, 쓸 만한 제품은 최소 50만 원은 줘야 하니 선뜻 사기도 좀 그렇습니다.
땔감 구하려면 산에 올라야 합니다. 산주(山主)가 참나무 자르는 거야 아무 말 안 하지만 이왕이면 미리 잘라놓은 나무를 갖고 옵니다. 그런 나무는 바싹 말라 바로 땔감으로 쓸 수 있으니까요.
어느 산이든 잡목을 잘라내 버리는 추세입니다. 잡목 베어 낸 그 자리에 돈 될 나무를 심으려 하니까 군데군데 잘라놓은 나무가 보입니다. 가장 많이 잘린 나무는 아카시아. 아카시아는 양봉을 제외하면 도움 되지 않고 번식력도 강하여 산주들의 애물단지입니다.
헌데 이 아카시아 나무는 불땀이 참 좋습니다. 마르면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손톱’으로 자르기 힘들 정도로. 아카시아 말고도 참나무, 산뽕나무, 산벚나무, 낙엽송도 눈에 뜨입니다. 가끔 '닥나무'도 보이는군요.
아 참, 옛날 종이 만들 때 쓰던 닥나무는 불땀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같은 부피라도 아카시아랑 비교하면 반의반이 될까요.
나무꾼은 불땀 좋은 나무를 구해 내려오는데 요즘은 지게 대신 어깨 매고 내려오니 좀 힘이 듭니다. 내려오면 다음 단계는 땔감 쪼개는 일입니다. 우리 집 아궁이에 들어갈 장작은 길이가 30cm 정도라야 하니 그 크기에 맞게 도끼로 자릅니다.
혹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텔레비전 프로그램 보면 웃통을 벗고 도끼질하는 야성미 넘치는 주인공을 보았을 겁니다. 팍! 팍! 하며 힘차게 도끼 내리치면 둘로 퍽퍽 쪼개지는 나무를 보면 보는 사람도 시원해집니다.
그럼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나무는 방금 잘라낸 나무가 잘 쪼개질까요, 바싹 마른나무가 잘 쪼개질까요? 바싹 마른나무는 쩍쩍 금 가 있어 금방이라도 도끼로 내리치면 쪼개질 것 같습니다. 다들 그렇게 알고 계시지요?
허나 나무를 쪼개며 사는 사람들은 방금 잘라낸 나무가 훨씬 더 쉽게 갈라짐을 잘 압니다. 좀 의아하지요? 어떤 나무든 한 달만 지나면 수분이 증발하면서 나이테가 비틀립니다. 비틀리면 나무꾼 고수라도 ‘1’ 자로 잘 쪼개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보는 둘로 퍽! 퍽! 쪼개지면 바로 한 달 채 안 된 나무들입니다.
어떤 나무든 그 최종 목적지는 바로 아궁이입니다. 가구로 쓰이든, 목재로 쓰이든, 장승으로 쓰이든 마지막엔 아궁이에서 장렬하게 산화합니다. 어떤 글쟁이는 이를 두고 나무의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는 깔쌈한 표현을 했습니다만 나무의 입장에서 볼 때 이 표현이 맞을까요?
소신공양은 아시다시피 자신의 몸을 태워 주변(사람이든 중생이든)을 널리 이롭게 하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나무는 스스로 타지 않습니다. 아니 불에 타 하늘로 갈 마음은 애당초 없었습니다. 함에도 사람들은 자기들 멋대로 그런 표현을 붙였습니다.
엊저녁 불을 지피면서 며칠 뒤 삼겹살 구워 먹을 손님 온다 하여 숯을 만들기로 하였습니다. 숯 만들다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무만큼 억울한 존재가 또 있을까.' 대부분 한 번 아니면 많아야 두 번의 죽음으로 끝나는데...
물고기가 사람의 손에 잡히는 순간 한 번의 죽음이요, 다시 불에 구워지면 두 번이 됩니다. 물고기뿐 아니라 사람 입에 담기는 대부분의 동물이 다 그렇군요. 아니 사람도 화장하면 두 번의 죽음이 되는군요.
그에 비하면 땔감으로 쓰는 나무는 톱으로 잘려 한 번 죽음을 당하고, 불에 타서 두 번째로 죽음 당하고, 다시 숯이 되면 한 번 더 타서 세 번의 죽음을 당합니다. 죽어가면서도 마지막 불꽃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하고 죽는다는 말을 합니다만 정말 나무는 그러고 싶을까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 다 사람의 관점에서 만든 이기적인 표현들. 그래서 저는 바꾸었습니다. 나무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 앞글에서 여러 번 언급했습니다만 제가 눈이 나빠 휴대폰으로 작업하지 않고 컴퓨터 대형화면으로 작업합니다.
그래서 제 글 라이킷 하신 분들의 글을 찾아가 읽고 라이킷 해주지 못하고 그저 구독하기만 눌러줌에 양해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