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구정 직전에 쓴 일기에서 뽑았습니다.
* 오늘도 나는 걸으며 듣는다 *
- 재잘거리다 지줄대다 깨뜨리다 -
요즘도 마을을 한 바퀴 돈다. 다만 아침 일찍이 아니라 해가 뜬 한참 뒤 아니면 점심 먹은 후 돌지만. 확실히 겨울이라 그런지 눈에 담기는 게 적다. 꽃은 거의 보이지 않고 찔레ㆍ피라칸사스ㆍ남천나무 빠알간 열매만 볼 수 있다.
시각적으로는 볼 게 적으나 청각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봄여름 가을에도 들리는 소리는 많지만 하도 여러 소리가 들려 어지럽다고나 할까. 그런데 겨울엔 소리가 몇 정해져 있어 아주 뚜렷이 들린다. 깔끔, 영롱, 청량한 소리가 속속 귓속을 파고든다.
길을 나서 갈림길 사거리에 이르러 윗마을로 접어든다. 이곳은 산을 타는 사람들에겐 장난이지만 늙다리에겐 좀 가팔라 운동이 꽤 된다. 들어서자마자 풀숲이 요란하다. '사사삭! 사사삭!' 움직이며 "째재잭! 째재잭" 재잘대는 소리가 연거푸 나면서 참새들이 뛰쳐나온다.
참새, 제대로 셀 수 없지만 얼추 이삼백 마리는 되리라. 녀석들은 멀리 날아가지 않고 바로 곁의 풀숲으로 옮긴다. 만약 내가 나아가는 방향 뒤로 옮기면 그대로 잠잠해지나, 앞으로 옮기면 다시 재잘거리며 걸음을 방해한다.
참새를 떨치고 좀 더 올라가다 준비 안 돼 있으면 깜짝 놀랄 이벤트가 기다린다. 고라니 아니면 꿩이 뛰쳐나오니까. 녀석들은 참새 떼처럼 사전에 재잘거림 없이 바로 뛰쳐나오기에 화들짝 놀라기 일쑤다. 준비했다 해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지만.
처음 고라니는 제가 더 놀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더니, 요즘은 달아나면서 힐끔힐끔 뒤돌아본다. 마치 ‘아, 왜 또 와!’ 하는 짜증 섞인 얼굴로. 꿩도 놀라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녀석들 날아가는 모습이 어설픈 데다 그 소리마저 촌스럽다. ‘쿨렁!’ ‘쿨렁!’ 마치 물주머니 차고 나르는 양.
다음으로 달내계곡에 이르면 들려오는 소리는 물소리다. 이 소리도 날마다 같진 않다. 물의 양에 따라 차이 나는 게 아니라 얼음 언 정도에 따라 다르다. 기온이 떨어져 꽁꽁 얼게 되면 물이 얼음 밑으로 흐르니 갓난아기 잠잘 때 새근새근 내는 숨소리처럼 귀엽다.
기온 올라가 얼음 녹으면 달라진다. 정지용 시인의 「향수」에 나오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나가고”처럼 지즐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줄대다, ‘거침없으면서 다정하고 나긋나긋한 소리를 내다’ 참 예쁜 우리말이다. 이런 고운 말은 이제 글 아니면 만날 수 없으니 안타까울 뿐.
이처럼 자연에는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소리가 있고, 고라니나 꿩처럼 적막을 깨뜨리는 소리도 있고, 시냇물처럼 지줄대는 소리도 있다. 우리들 사회에도 이런 소리가 있다.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여럿이 놀며 내는 소리는 참새떼가 '재잘거리는' 소리와 다름없다.
시냇물 지줄대며 흐르는 소리도 우리 사회에 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말소리를 들어보면 시냇물 지줄대는 소리와 똑같으니까. 물론 고라니나 꿩처럼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는 우리 사회에 많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자동차 경적소리,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 중장비가 내는 소리 등.
뿐이랴, 텔레비전을 틀면 곳곳에서 들려오는 싸움 소리도 빼놓을 수 없다. 우크라이나 아파트 폭격하는 러시아 미사일 소리부터, 국회에서 터져 나오는 언짢은 소리들. 그런데 사람사회가 만들어내는 소리는 고라니나 꿩이 만들어내는 소리와 아주 다르다.
고라니와 꿩이 갑작스럽게 뛰쳐나와 사람을 놀라게는 하지만 그 소리를 금방 잊어버린다. 즉 짜증이 오래가지 않는다. 하나 사람사회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소리는 잊히지 않고 귀에 쟁쟁하게 끊임없이 들려온다. 머릿속까지 울려 내내 지끈지끈할 정도로
소리를 분석해 보면 귀에 들리는 소리와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있다. 또한 듣고 싶은 소리와 듣고 싶지 않은 소리도 있다. 게다가 들리지는 않지만 듣고 싶은 소리도 있다. 마을에서 오래전에 끊긴 갓난아기 울음소리는 듣고 싶지만 들려오지 않은 지 이미 오래.
또 실제로는 들리지는 않지만 들린다고 믿는 소리도 있다. 달보름 뒤면 나뭇가지에서 재잘거릴 새싹들이 움돋는 소리. 이런 소리는 늘 들어도 싫증 나지 않는다. 아니 기다리는 소리다. 더욱 설 끝날인 화요일부터 들이닥칠 '초강력 한파'가 예정돼 있을 때는.
지금은 들리지는 않지만 늘 귓가를 맴도는 소리도 있다. 자신의 의지완 관계없이 하늘로 간 원혼들이 내는 소리.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있다. '사내는 모쪼록 강하게 살아야 한다'가 아버지 말이라면, '애비야 우짜던동 남 폐 끼치지 말고 살아라'는 엄마 말이다.
설날을 맞이하며 들리기를 바라는 소리를 나열해 본다.
'방방곡곡에 울려 퍼지는 애기 울음소리'
'통일의 훈풍이 일어나며 내는 소리'
'우리 경제의 부활을 알리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
아 거기에 하나 더 보탠다.
'전통시장에서 들려오는 장사치와 손님의 흥정하는 소리’
어느새 시장에 소리가 가늘어졌다. 시장 소리는 서민의 소리고 끊겨선 안 될 소리다. 왼쪽 입실장과 오른쪽 양남장에 손님이 아주 적어졌다.
그런데 이런 소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당장은 아주 희박하니까. 그래도 우리 겨레를 믿어야지. 이 정도 고난은 역사를 뒤적이면 수없이 많다. 그리고 역경을 떨치고 일어난 적이 한두 번인가.
좋은 소리, 듣고 싶은 소리, 맑은 소리, 아름다운 소리가 새해에 들려오기를 진심으로 기도해 본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