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예배당에 갔더니...
나이 좀 든 이들에겐 교회란 말보다 예배당이란 말이 귀에 익을 게다. 그 예배당이라는 데를 여섯 살 무렵부터 다니게 되었다. 아니 다닐 수밖에 없었다. 커서 들은 얘기로는 팔칸집 주인아저씨가 예배당의 장로였는데, 은근히 압력을 넣었다 한다. 당시에 집주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고 했으니….
다른 가정에서는 어른들이 나갔는데 우리 집에서는 내가 갈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절대로 예수꼬랑댕이는 될 수 없다 하셨고, 엄마는 절에 다니기에 거부하셨고, 공장에 다니던 누나들은 일요일에도 잔업하느라 다닐 수 없었으니 내가 선택됨은 필연이었다.
장로님의 전교술은 아주 뛰어났다. 예수님은 사흘만에 부활하셨지만 나는 나간 지 사흘만에 열렬한 신자가 되었다. 처음 간 그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였고, 다음날이 크리스마스였으니 어린애가 빠져나갈 수 있었을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찬송가, 생전 처음 보는 성극무대, 그보다 절로 침을 흘리게 한 성탄떡을 입에 대는 순간 하나님의 착실한 어린 양이 되고 말았다.
노래가 너무 재미있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다람쥐가 재주넘는다. 폴짝폴짝 재주넘는다. 다~람쥐가 재주넘~는~다.”
이 노래 말고도 '꼬마 교통순경 아저씨'를 배웠으나 불행히도 가사가 기억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들어갈 때쯤에는 제법 수준 높은 노래도 배웠으니 ‘탄일종이 땡땡땡’이란 노래였다.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이런 좋은 노래만 기억하는 건 아니다. 오십 줄에 들어선 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으리라.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아라 해놓고, 신발 뚱쳐(훔쳐) 가더라.”
이 노래가 나온 배경을 살펴보면 쓴웃음이 절로 나온다.
당시 예배당은 지금처럼 신발장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입구에 신발을 그냥 놔두고 들어갔다. 안의 모습도 지금과는 달랐다. 바닥이 맨흙이었는데 다만 앉을 자리만 길 널빤지로 돼 있었다. 환경이 열악했기에 어쩌면 진지함이나 신앙심은 더 깊었으리라.
그런데 어디 가도 나쁜 이들은 있었던 모양이다. 예배보다 다른 데 관심 있는 이들이 헌 신발을 신고 와서는 남보다 일찍 나가면서 새신발로 신고 갔다. 요즘처럼 신발의 형태와 회사가 다양했더라면 혹 다음에 자신의 신발을 보면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그때는 오직 검정고무신 뿐이었다.
아시다시피 검정고무신이 나오던 초기에는 '동양고무'에서 만든 기차 무늬가 새겨진 고무신뿐이었고, 다음으론 타이어가 새겨진 '보생고무'의 검정고무신이었으니 문수만 같다면 나의 것과 남의 것 구별되지 않았다. 그걸 나쁜 이들은 노렸고, 그걸 빗대 노래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노래보다 성경퀴즈가 나의 흥미를 끌었다. 다니던 예배당에서는 물론 지역 대회에 가서도 상을 쓸어왔다. 상을 받다보니 더욱 신났고, 학교 공부보다 성경 공부가 우선이었다. 장로님의 부추김도 한 몫 했다. 성경 공부만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다 주신다는 것.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하여튼 예배당 다니는 그 시간보다 더 즐거운 시간은 없었다.
예배당 갈 때는 장로님 댁 가족과 함께 갔는데 3학년 때쯤인가부터는 옆집 바우 엄마랑 가게 되었다. 바우('바위'의 사투리)는 본명이 아니라 그 시절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잘 죽었기 때문에 오래 살아라고 아이이름을 따로 만들어 붙였는데 그 이름들 중 하나다. 남자아이들 가운데는 개똥이, 똥개, 바우, 돌쇠, 차돌이처럼 아무렇게 놔둬도 생명력 강한 존재의 이름이 붙은 이가 많았다.
바우 엄마는 과부였다. 바우와 그의 누나와 외할머니, 이렇게 넷이 살았다. 바우 엄마는 하는 일 없었으나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바우 외할머니가 이름난 무당이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무당이고 딸이 예배당에 다닌다고 하여 무슨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어린 나로서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가 사는 집이 팔 칸이니 여덟 가구라 조용할 리 없건만 옆집 바우네는 더했다. 조용히 넘어갈 때가 없었다. 굿을 할 때야 어차피 밤을 지새우니까 잠까지 방해받았지만 굿을 하지 않을 때도 시끄러웠다. 늘 엄마와 딸의 싸움이었다. 무당인 엄마와 예배당 다니는 딸의 싸움이 어떻게 결말지어졌는지 모르나 일요일 아침이면 나를 데리려 오는 바우 엄마의 얼굴에는 전날의 싸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인가, 바우네에서 여태까지 본 어떤 싸움보다 더 큰 싸움이 벌어졌다. 엄마와 딸의 싸움이 아니라 웬 아주머니 셋이 달려들어 일방적으로 바우 엄마를 패대기치는 싸움이었다. 그 날은 공교롭게도 바우 외할머니가 굿 하러 이웃 마을로 가셨던가 보다.
사람들은 몰려들었건만 아무도 말리지 못하고 구경만 할 뿐이었다. 세 여자의 억센 팔에 머리카락이 뜯겨나가고, 옷이 찢겨지면서 가슴까지 내보이는 상황에 이르고, 넘어진 바우 엄마를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하며 진짜 죽일 듯이 밟을 때서야 우리 엄마를 비롯한 동네 아줌마들이 달려들어 말려 겨우 소동은 수습되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예배당에 혼자 가야만 했다. 바우 엄마는 예배당은 물론 집 밖에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때 다쳐 누워있는가 했다. 그런데… 그런데 한 달쯤 지났을까, 조용하던 동네가 난리가 난 듯 시끄러워졌다. 바로 바우 엄마 때문이었다.
다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였을 때 그녀의 옷차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귀신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아래 위 하얀 치마, 하얀 저고리. 그러나 옷차림은 다음에 이어지는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누구를 보지도 않고, 누가 불러도 듣지 못한 양 타작마당을 향해 뛰어가 거기에 이르면 갑자기 옷을 찢어버리면서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하고 외쳤다.
남자 어른들과 우리 같은 꼬마들은 킬킬 거리고 웃는 반면 아줌마들은 질겁했다. 연락을 받은 바우 외할머니가 치마를 들고 와 감쌀 때까지 그런 모습으로 있었다. 처음 한동안은 한 달에 한 번쯤이었던 것 같은데, 일주일에 한 번씩 그런 일이 있으면서 바우 외할머니가 큰 결심을 했던가 보다.
하루는 울엄마가 콩나물 다듬으면서 눈은 바우네를 보며 혼잣말 하듯이,
“아이고 바우 엄마 팔자도… 서방 잃고 혼차 살면서도 참말로 뜨시게 사는갑다캤더니만… 만다꼬 예배당에는 나가가지고 냄편 있는 남자를 알았을꼬. 쯧쯧… 바우 외할매 속이 속이 아닐끼다. 자기 외딸만은 무당질 안 시킬라꼬 그리도 애써샀더니만… 결국은 내림굿을 하능가 보네.”
그 날 밤늦게까지 다시 굿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색찬란한 활옷을 입은 바우 외할머니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새끼무당이 무릎 꿇은 바우 엄마를 둘러싼 채 징을 치고, 대나무를 흔들고, 땅을 굴리고, 칼춤을 추고, 온몸에 뭘 뿌리고… 나와 꼬마들은 처음에는 신기한 광경에 집중했으나 이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다른 때와 달리 굿상 위에 높이 솟은 음식에 눈독을 들이며 잠을 몰아내려 할 즈음이었다. 징소리가 더욱 높아지며 무당들의 춤사위가 격렬해질 때 갑자기 굿 가운데서 웬 소리가 났다. 바로 “죽여라!” 하는 외침이었다.
이어 그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던 바우 엄마가 일어나면서 “죽여라!” 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가슴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돌발적인 상황에 무당들이 달려들어 도로 앉히려고 양팔을 잡아당겼으나 워낙 세게 휘두르는 바람에 하나 둘씩 나가떨어지자 바우 엄마가 구경하는 사람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태에 사람들이 찢어지듯 비명을 내지르고, 이어 그 소리가 가라앉을 즈음, 바우 엄마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바우 엄마는 타작마당의 당산나무에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보름도 안 돼 바우네가 이사를 가고, 한동안 동네 사람들의 입에서는 그 집 이야기가 마을에 떠돈 모양이나 아이들은 그리 자주 찾던 백곡마당을 가지 않았을 뿐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이제사 바우 엄마와 그 남자, 그리고 몰려왔던 세 여자의 관계를 충분히 유추해 낼 수 있다. 다만 아프다. 바우 엄마의 사랑이. 그리고 너무 슬프다. 그렇게 끝낼 수밖에 없었는지.
*. 커버 사진은 <안양지역 도시지역 연구소> (1959년 2월 22일)에서 퍼옴
그리고 수필은 사실 그대로 적어야 하나, 이름과 별명과 나이 등을 다 바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