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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63)

제263편 : 정호승 시인의 '봄길'

@. 오늘은 정호승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봄길
정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97년)

#. 정호승 시인(1950년생) : 경남 하동 출신으로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를 통하여 등단. 고교 교사, 잡지사 기자로 일하다 40세 때 직장을 그만두고 시를 쓰고 강의를 다니는 전업 시인으로 생활.
태어난 곳은 경남 하동이나 성장한 곳은 대구라, 이런 까닭으로 대구시 수성구에 '정호승 문학관'이 있음. 노래로 불린 시만 해도 수십 편, 교과서에도 수십 편이 실린 우리나라 대표 서정시인.




<함께 나누기>

정호승 시인을 대중이 좋아하는 시 쓰는 시인이라 소개하면 되겠지요. 그만큼 읽으면 입에 착 달라붙고, 거기에 담긴 의미도 좋습니다. 입에 착 달라붙는다는 말은 운율을 살린 시가 많고, 담긴 의미가 좋다는 말은 가난하고 소외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담은 시가 많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아직 1월이 끝나기 전이라 봄은 멀었습니다만 우리 모두는 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계절의 봄이 아닌 '마음의 봄날'을. 긴긴 겨울이 길어지면서 우리네 마음에도 어둠이 점점 짙어갑니다. 그럴 때 시 한 편이 얼어붙은 우리 마음을 조금이라도 풀어준다면...

시로 들어갑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을 암시합니다. 그런 상황에 놓이면 좌절하기 마련이지요. 허나 화자는 그곳에 ‘길이 있다’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어떤 어려운 현실도 극복할 수 있음을 제시합니다.
‘밑바닥에 다다른 사람에게 마지막 희망은 더 떨어질 바닥이 없는 대신 올라갈 길만 남았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길이 없으면 일단 주변을 돌아보며 길을 찾아봅니다. 그래도 보이지 않으면 자신이 길을 만들면 됩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길이 되는 사람’은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아 절망만 남았을 때 그에 굴하지 않고 현실을 극복하려는 존재입니다. 이런 사람은 뒤에 나오는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과 같은 뜻을 지닙니다.

자 제가 앞에서 운율 잘 살리는 시를 쓰는 시인이라는 말을 언급했습니다. 그럼 거듭나온 ‘~이 있다’를 봅시다. ‘~이 있다’란 표현이 짧은 시에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됩니다. 이런 비슷한 문장 구조의 반복은 의미를 강조하며 운율 형성에 아주 효과적입니다. 그리고 ‘~이 있다’라는 표현은 매우 단정적 어조라 비록 지금은 힘들지 몰라도 언젠가는 절망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앞 시행까지만 보면 절망적 상황의 극복이 그리 어렵지 않아 보입니다. 허나 그 길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강물 새 꽃잎’ 세 시어에 주목합니다. 강물은 거침없이 흘러가고, 새는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며, 꽃도 피고 싶을 때 핍니다. 즉 모두 ‘자유로움’의 상징적 존재들입니다.
이들은 일상적 세계에선 언제나 자유로워야 할 존재들인데, 그러지 못한 암담하고 절망적 상황에 놓였습니다. ‘강물 새 꽃잎’이란 흔히 쓰는 시어를 선택하여 자유에서 통제로, 통제에서 절망으로 이어지는 시상(詩想)을 잘 표현합니다.

“보라 /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두 시행에 쓰인 ‘사랑’과 ‘봄길’, 이 두 시어는 원래는 다른 의미나 여기선 지향하는 바가 같습니다. ‘봄길’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뤄집니다. 그 희생의 기반이 바로 ‘사랑’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낸 후 더욱더 견고해진 ‘사랑’이 또 다른 봄길을 열어갑니다. 허니 둘은 절망적 상황을 극복하고 사랑과 희망을 전해주며, 다른 사람이 걸어갈 길을 만들기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존재입니다.

언제 우리나라에 따뜻한 봄길이 열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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