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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우씨의 詩詩하게 살자(266)

제266편 : 김수영 시인의 '절망'


@. 오늘은 김수영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 [사랑의 변주곡](1990년)

#. 김수영 시인(1921년 ~ 68년) : 서울 출신으로 처음엔 연극배우로 활동하다 1946년 [예술부락]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 거칠고 힘찬 어조로 소시민 같은 자아에 대한 가차 없는 자기 폭로와, 후진적 정치 문화에 대한 질타와, 통렬한 비판으로 참여시인이란 평을 들음.




<함께 나누기>

해마다 200여 명쯤 되는 시인의 시를 배달합니다. 전에 다룬 시인의 시를 주로 싣는데 그 가운데서도 1/5 정도는 바뀝니다. 오늘이 그런 날입니다. 작년 이맘때 배달한 시인 대신 어느 시인을 넣을까 하다가 아는 이의 추천을 받아 올리게 되었습니다.
여태 1980년 이전에 돌아가신 시인은 제외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시인까지 포함하면 너무 많고 가능한 현대시 흐름을 익히고자. 그런 점에서 오늘 김수영 시인도 제외해야 할 분입니다만 비록 60년 전에 썼으나 이 시점에 딱 들어맞는 시라 여겨 배달합니다.

시로 들어갑니다.

1행 ~ 4행까지 읽으면 당시에선 쉬 볼 수 없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풍경과 곰팡과 여름과 속도는 서로 관련 없는데 더욱 반성하지 않는다? 무슨 뜻인지 독자를 갸우뚱하게 만듭니다. 뒤를 읽으면 전혀 변화지 않는다는 공통점 지닌다고 합니다. 이상하지요, 풍경과 곰팡과 여름과 속도는 변화의 대상인데...
지금 눈에 보이는 풍경은 고개만 돌렸다 다시 보면 변화돼 있고, 어떤 것이든 가만 두면 곰팡이가 슬어 못 쓰게 변합니다. 여름도 마찬가집니다. 한참 더위에 시달리다 보면 곧 가을입니다. 속도 또한 마찬가집니다. 달리는 존재는 속도가 변하기 마련이기에.
헌데 시인에게 풍경은 그대로 있고, 곰팡이가 그대로 슬어가고, 계절이 바뀐 줄 모르며 살고, 발전의 속도는 어마어마한데 우린 그대로입니다. 시인이 보기에 이런 상태는 변화를 두려워하기에 오며 반성을 해야만 변화가 이뤄질 수 있다고 질타합니다.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하고 수치스러운 짓을 하면서도 반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바꿔보겠습니다. ‘졸렬함과 수치를 반성해야 변하게 된다’로. 1960년대를 꿰뚫은 시인의 눈에 담긴 당시 사회는 졸렬하고 수치로 꽉 차 있습니다. 그 해결의 실마리는 ‘반성’인데 누구도 반성하지 않습니다.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우선 '바람'은 변화의 바람입니다. 변화의 바람이 불어야 구원의 순간이 예기치 않은 때 온다고. 변화의 바람과 구원 둘 다 그냥 얻어지지 않습니다. 뒤 시구를 보면 반성하지 않으면 절망뿐이니까요.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이 시행 두고 해석이 둘로 나뉩니다.
앞 시행에 이어 읽으면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는데 모두들 절망에 빠져 헤어 나올 방향을 찾지 못한다'는 부정적 인식으로 읽거나, 다음은 절망에 빠져 헤어 나올 방향을 찾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 구원의 순간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니 반성하여 그 기회를 포착하라고. (저는 후자에 방점을 찍습니다)

60년 전에 쓰인(시집은 1990년에 나왔지만 시가 쓰인 연대는 1965년) 시 '절망'이 현실과 똑같다는 사실이 또 우리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60년 간 우리나라는 엄청난 발전을 이뤘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식으로 말하면 선진국(그래서 국방비 증액을 요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입니다.
허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목소리 큰 사람의 말이 정의가 되고, 힘센 이의 논리가 그대로 진리가 되고,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이 우리를 절망하게 합니다. 희망은 처절한 자기반성에서 옴이 분명할진대 누구도 반성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반성하는 사람만 바보가 되는 이상한 사회가.

그럼에도 이 시는 길을 제시합니다. 반성한다면, 자기 잘못을 뉘우친다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뀐다고. 그래야 한다고. 거꾸로 지금처럼 반성하지 않는다면 60년대의 혼돈시대로 돌아감은 불을 보듯 환합니다.
예기치 않은 순간에 바람처럼 올 구원을 기다리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 사진 둘 다 [이로운넷](017.12.22)에서 퍼왔는데 뒷사진은 수류탄이 전쟁(절망)을 비유한다면 거기에 핀 꽃은 희망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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