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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가 이야기(제7편)

제7편 : 찬기파랑가

♤ 향가 이야기 ♤



- 제7편 「찬기파랑가」 -


당대 신라인들에게 가장 추앙받은 남자는 어떤 사내였을까요? 큰 의문 없이 답이 나올 겁니다. 화랑도 중에서도 명망 있는 인물. 오늘은 바로 그 화랑을 찬양한 노래를 다뤄 봅니다.

「찬기파랑가(讚耆婆郎歌)」는 경덕왕 때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10구체 향가입니다. 이 작품도 앞에서 다룬 '제망매가'와 같이 문학성이 아주 뛰어난 향가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학자에 따라 해석도 다르고, 노래의 성격 규정도 다르고, 주인공 기파랑은 화랑이 아니라고 하는 학자도 있어 논란이 많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먼저 배경설화부터 봅시다. 다만 [삼국유사]에 전하는 14수 가운데 해당 향가와 관련된 배경설화가 가장 희미한 작품입니다.

“경덕왕이 대사의 '찬기파랑사뇌가'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충담이 '그렇다' 하고 답합니다. 그러자 왕이 이어서 “그렇다면 짐을 위하여 「안민가」를 지어라.”고 하여 충담이 「안민가」를 지었다."
이렇게 끝납니다.

이 노래도 국어교과서에 실려 기억하실 분이 많을 겁니다만 기억 새김을 위해 다시 적어봅니다.

"(구름을) 열어젖히니
나타난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가는 것 아니냐?

새파란 냇가에 기파랑의 모습이 있구나.
이로부터 냇가 조약돌에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련다.

아아, 잣나무 가지 높아
서리를 모르실 화랑의 우두머리여."
(양주동 박사의 해독 참조, 그리고 세 단락으로 나눔은 이해를 돕기 위함)


달이야 이미 떴지만 흰 구름으로 가려 볼 수 없는데 구름이 비키자 달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달을 향했던 눈길을 아래로 주니 새파란 냇물에 기파랑의 모습이 비춰 보입니다. (어떤 사람을 무척 그리워 하면 그 사람 얼굴이 환상처럼 나타나듯이)
그는 냇가 조약돌처럼 둥글둥글한 성격, 즉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로 누구나 다 따르는 화랑이었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이렇게 속으로 기원합니다. '나도 기파랑께서 지니신 그 훌륭한 마음의 끝이라도 따르고 싶다.'고. (양주동 박사 식 해독)
기파랑에 대한 찬양은 끝 두 구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얼마나 그의 인격이 고매한지 나무 가운데 그 높이로는 으뜸인 잣나루를 끌어옵니다. '잣나무 가지처럼 높아 서리(시련과 역경)도 내리지 못할 화랑의 우두머리 기파랑이시여!' 하며.

여기서 '기파랑이 누구인가?' 참 궁금한데 관창이나 원술처럼 역사에 단 한 줄 그 이름이라도 나와 있으면 좋으련만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정체가 모호한 것이죠. 그래서 학자들은 그 정체를 규명해 보려 했습니다.

당대 화랑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고결하고 숭고한 정신의 소유자'라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달리 이 노래를 불교적으로 보아 불교에서 전해 내려오는 설화 가운데 ‘기파(耆婆) 설화’와 관련된 인물이란 견해, 또 경덕왕이 믿었던 중신이었으리란 견해,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유명한 화랑도 사다함(斯多含)으로 보는 견해, 실존 인물이 아니라 생명신 혹은 창조신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 부처를 치료했다고 알려진 고대 인도의 의사 '지바카'라는 견해 등.


5_0jaUd018svclygw8tvc9vxo_149gk0.jpg?type=e1920_std ([삼국유사] '찬기파랑가' 부분)



그리고 이 노래의 성격에 대해서도 여러 학설이 존재합니다. 당대 '가장 뛰어난 화랑을 예찬한 노래'라는 설이 일반적이라면, 이 노래는 불교찬송가인 향찬(鄕讚)으로 기파랑이 죽은 후에 열린 재식(齋式)에서 올린 '불찬가(佛讚歌, 불교찬양가)'였다고 본 견해.
또 장차 출생할 왕세자가 기파랑과 같은 인격을 지니기를 발원하는 노래라는 견해, 덧붙여 그 무렵 쇠퇴·약화 일로를 걷고 있는 화랑단의 형세를 애석하게 여긴 나머지 화랑단의 재생을 은근히 기원하는 노래라는 견해 등.


특히 이 향가에만 [사뇌가(詞腦歌)]란 말이 들어 있어 향가의 다른 이름으로 "사뇌가"란 용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사뇌가란 용어를 향가 대신 쓰자는 주장도 나왔으니 그에 대해선 다른 곳에서 언급하겠습니다.

최근에 들어 많은 이들이 인용하는 김완진 교수의 해독을 덧붙입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양주동 박사의 해독과 차이가 아주 심합니다.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 밝힌 달이
흰 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모래 가른 물가에
기파랑의 모습과도 같은 수풀이여.
일오내(라는) 자갈 벌에서
(기파)랑이 지니시던
마음의 끝을 따르고 있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

두 분의 해석 중 어느 게 더 나은지는 아무래도 연구가 많이 진행된 후자 쪽에 있겠지요. 다만 양주동 박사의 해독은 시인이라서 그런지 운율을 살려서 읽기가 더 편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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