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향가 이야기(제9편)

제9편 : 처용가

♤ 향가 이야기 ♤



- 제9편 「처용가」 -


제1편에 향가 이야기를 꺼내면서 만약 고려가요와 향가에 「처용가」가 없었더라면, 우린 아직 향가를 모르거나 훨씬 늦게 알게 되었으리란 말을 언급한 적 있습니다. 그만큼 이 노래가 향가 연구에 소중한 자료라는 말이지요.

이 작품은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모죽지랑가」와 더불어 단 두 편 남은 8구체 향가입니다. (「모죽지랑가」 설명할 때 언급했습니다만 4구체 8구체 10구체 세 분류 구분에 반대하는 학자도 있음)




먼저 배경설화부터 봅시다.

“신라 제49대 왕 헌강왕이 개운포에 나가 놀다가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줘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왕은 담당 관원에게 용을 위해 근처에 절(망해사)을 세우도록 명하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그곳 이름을 개운포(開雲浦)라 했다. 그 사실을 알고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용왕이 자기 아들 가운데 한 명을 헌강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정치를 돕도록 했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의 능력에 감탄하여 곁에 두려고 미녀를 아내로 주고, 그의 마음을 잡아 두려고 '급간' 벼슬까지 주었다. 헌데 그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놀다 돌아와 침실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화를 내는 대신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이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나쁜 일이 있을 때는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


(처용무에서 처용탈)



노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양주동 박사의 해독 참조)

“서울 밝은 달밤에
밤들도록 놀며 다니다가
집에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아내의 다리)이었는데
둘은 누구의 것인가?
본디 내 것이지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겠는가?”

내용은 이미 다 아실 걸로 알고 두 가지만 잠시 짚어보겠습니다.
하나는 처용 혼자 밤늦도록 놀며 다니다가 집에 왔습니다. 처용이 왕의 일을 밤늦게까지 도와줬다가 아닌 '놀다가'. 여기서 요즘처럼 회식문화가 당시에도 있지 않았나 하는 점. 그렇다면 요즘처럼 같은 부서(?) 사람끼리 어울려 1차 2차 3차로 이어지는 술집 행렬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침실에 들어오니 아내만 있다면 다리가 둘이어야 하는데 넷입니다. 거기다 둘은 털이 북실북실한. 보통 남자라면 당장 도끼를 들고 나서야 하련만 처용은 그 자리에서 빼앗겼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노래를 부릅니다.


(처용 전설의 흔적인 처용암 - 비석 오른쪽 멀리 보이는 작은 섬)



이렇게 이상한(?) 행동을 하는 처용을 두고 그의 정체가 무엇일까 궁금할 겁니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다른 이론을 내놓았습니다.

1. 불교적 측면에서
(1) 설화에 언급된 처용의 관용적 행동으로 보아 "중생을 교화시키려 나선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용자(龍子) 곧 '불자(佛子 : 불제자)'다.
(2) [계림유사]에 ‘龍曰稱(용왈칭)’ 내용이 있으니 거기서 ‘龍 = 處容 = 稱’의 등식이 성립한다. 당시 ‘稱’이 '칭' 대신 ‘츙’으로 발음되었으리라 보며 이는 나중에 ‘즁’으로 변했으니 결국은 처용은 ‘중’이다.

2. 무속적 측면에서
(1) 처용은 용신(龍神)을 제사 지내는 의식에 참가한 한 사제자인 '무남(巫男 : 남자무당)'으로 본다.
(2) 처용의 한자 ‘處容’의 현대음은 ‘제웅’이며, ‘제웅’은 짚으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액을 막는데 쓰는 주술인형이다.

3. 역사적ㆍ사회적 측면
(1) 당시에 신라는 국제교역이 활발하였고, 특히 처용의 용모를 심목고비(深目高鼻 : 눈이 깊고 코가 높음)이라 하였으니 이는 이슬람 세계와 교역관계를 주도한 ‘이슬람 상인’이다.
(2) 경주의 동쪽에 있는 ‘반중앙적 호족(豪族)의 아들’이다. 특히 울산(당시 '우시산국')엔 그런 반골적인 호족들이 많았던 곳이므로 울산 호족의 아들이다.
(3) 당대 이름난 산과 강을 찾아 심신을 수련하며 음풍농월을 즐긴 풍월도적 미륵신앙을 갖고 있는 ‘화랑도’다.

4. 민속적 측면
(1) 신라 하대에 당대 임금의 총애를 받던 이름 날리던 '가면극(假面劇) 배우'다.

5. 기타
(1) 처용은 해(日)의 신 아니면 해의 넋인 가마귀(烏)라 볼 수 있다.
(2) 헌강왕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다.


(괘릉<지금의 원성왕릉> 길목에 자리한 석상 - 이슬람 사람 닮음)



이렇게 처용의 정체를 다양하게 보고 있으니 역신의 정체도 연구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일반적으로 열병신(熱病神 : 천연두 · 홍역 · 학질을 일으키는 질병의 신)으로 보고 있으나,
① 병든 도시의 유한공자(遊閑公子), 곧 타락한 화랑의 후예로 보는 견해,
② 탐락과 방탕 풍조에 빠져 있던 반도덕적 패륜아로 보는 견해,
③ 나라를 병들게 하는 어두움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 등.

이 노래를 사학계에선 신라 말기의 역사적 현실과 결부시켜 파악하는 게 현재 입장입니다. 즉 고려의 기인 제도처럼 지방 호족들의 반발을 억누르려 그들의 아들인 처용을 인질 형태로 데려와 곁에 두었다는 견해로. 그렇게 보면 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은 중앙 귀족 자제인데, 지방 호족을 무시하는 작태를 드러내며 당시 사회의 타락한 면모를 보여주는 노래로 파악한다고 합니다.

*. 사진은 모두 구글 이미지에서 퍼왔습니다.


keyword
이전 08화향가 이야기(제8편)